그냥 흙길이라 좋았다

사라진 흙길

by 무쌍

한 달을 꼬박 공사 중이다. 공원을 모조리 가림막으로 막 시작한 공사가 끝나질 않는다. 노후된 공원을 재정비한다며 안내문이 붙었고, 약속한 완공 기한은 여러 번 미뤄졌다. 포클레인은 숲 속 나무 사이를 시끄럽게 다니고 있다. 공원 산책로의 청단풍이 물든 풍경을 고대했지만, 포기한 지 오래다. 런데 더 아쉬운 일이 생겼다.


누가 흙길을 포기한 것일까?

공원에서 가장 빨리 바뀐 건 바로 길이었다. 흙길이 모두 블록이 놓인 것이다. 공원으로 연결되는 진입로가 모두 보도블록으로 깔렸다. 공원 둘레는 이미 시멘트가 발린 길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길은 그대로 두고, 작은 숲이었던 곳에 여러 개의 오솔길을 만들었다.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작은 제비꽃들이 웃어주던 산책로를 좋아했다. 여름 장맛비에도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솔솔 불어 흙길은 금방 보송거렸다. 흙길은 사람들이 오가며 단단해져서 비가 온 후에도 그렇게 질척이지 않았다.

나무 사이로 걷던 흙 위로 이제 보도블록이 깔렸다. 전엔 푹신한 흙위를 걸었을 수 있었다. 딱딱한 아스팔트, 시멘트, 벽돌 길에 익숙해서 인지 그 길은 내 맘에 쏙 들었다. 냥 흙길이라 좋았다. 도시에 살면서 숲길 걷는 기분을 느끼는 공원을 처음이었다. 내가 너무 사랑했나 보다. 하루라도 안 보면 궁금했고, 매일 찾아가도 질리지 않았다.


이별은 언제나 아프다. 막상 이별을 통보받고 나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만, 예전에 사랑하던 모습은 차가운 벽돌로 깔렸다. 공원을 한 바퀴를 다 돌았지만, 처음 사랑했던 흙길을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받아들여야 했다. 완전히 떠났다. 헤어짐을 확인하는 동안 분노는 계속 솟구치고, 금방 또 우울해졌다.


며칠을 앓고 나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를 떠나버린 흙길은 다시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익숙한 산책로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다시 찾은 공원엔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사람들은 보도블록이 깔린 위로 하얀 모래를 뿌리고 있었다. 뿌리고, 쓸고, 다지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한여름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앞에서 짜증 내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보도블록이 깔리지 않은 좁은 구석을 걸어보려고 했지만, 낙엽이 쌓여 발이 푹푹 들어가고 미끄러워 오래 걸을 수 없었다. 떠난 사람에게 징징대듯 구질구질한 기분이 들었다. 받아들여야 했다. 변화의 시간을 말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래도 실연당한 마음을 다독여 주고 싶었다.


흙길이 있는 중랑천으로 향했다. 모두가 겨울 뒤로 숨었을 줄 알았는데, 노란 꽃다발을 들고 달맞이꽃이 기다리고 있었다. 개망초도 귀엽게 솟은 모습으로 봄인 듯 향긋했다. 제초되어 아무것도 없던 길가엔 자주개자리가 새로 싹이 돋았다. 화가 난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그건 아마도 이런 마법 같은 순간을 보지 못해서 인가보다.

빈 흙은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흙은 땅 위로 떨어지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덮어 둔다. 그리고 덮어둔 흙을 뚫고 새싹이 올라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한다. 자연이 알아서 하는 일을 는 맹목적으로 사랑했다. 겨울엔 꽁꽁 얼어버린 흙이지만, 봄이 만들어 놓는 제비꽃의 작은 화단을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제비꽃 화단이 남겨둔 새 봄을 보지 못할 꺼란 기분에 속이 상했다.


어차피 떠난 존재에 아쉬움들은 계속 떠오를 것이다. 사랑이 떠나면 다른 상대를 찾으면 된다지만, 미련이 많은 내가 그러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별도 자주 하면 익숙해지는 걸까? 아니면 체념하는 일이 익숙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예전에 봄엔 아이리스가 피고, 늦여름엔 벌개미취가 가을이면 구절초가 피던 화단이 있었다. 학교 운동장만 한 했던 화단에 구절초가 한창이던 날이었다. 갑자기 공사 중 팻말이 걸리고, 회양목과 장미나무로 모조리 새로 심어졌다. 그 뒤로 야생화들을 못 본다는 생각에 장미꽃이 예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장미꽃은 해마다 꽃가지가 더 많아졌고, 그윽한 향기는 삐딱한 내 마음까지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곳에 다시 조명과 조화로 바뀌는 걸 보고 나서야 장미꽃과 회양목에게 미안해졌다.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었지만, 아이보다 못한 생각을 할 때마다 부끄러워진다. 새로운 것을 마냥 싫다고 투정 부릴수도 없었다. 하지만 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실연당한 마음은 달래야 했다.


헤어진 뒤에는 충분히 이별 기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까이 지냈던 사람과의 이별도 쉽지 않은 것처럼, 매일 함께 했던 일상도 마찬 가지였다.


예민한 내게 이별은 좀 유난스럽다. 나는 지금 이별하는 중이다. 이 시간을 다 보내고 나면 새로운 일상과도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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