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진정한 겨울이다

담쟁이 열매

by 무쌍

겨울이다. 만나러 갈 시간이 된 듯했다. 단정하게 머리를 빗고 깨끗한 얼굴로 만나고 싶었다. 구구절절한 살림 이야기 말고, 지끈지끈한 아이들 육아 이야기도 하기 싫었다. 운동화에 뭍은 흙을 털고 겉옷 입고 거울을 봤다. 내 얼굴엔 검은 뭔가 더 많아졌고, 머리카락은 하얀 뭔가가 많아졌다. 친구가 알아볼지 걱정부터 되었다.


중랑천을 따라 가면, 겨울에만 볼 수 있는 멋진 벽장식이 있었다. 회백색이 도는 푸른색 열매는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담장을 장식했다. 담쟁이덩굴이 글조글 주름 진채 매가 말라가고 있었다.


담쟁이덩굴 잎이 물들었을 땐, 다른 곳에서 단풍놀이를 하느라 가보지 않았지만, 한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그곳이 생각났다. 담장을 덮은 열매는 갤러리 한 벽면을 꾸며놓은 듯 름다웠다. 담쟁이를 만나는 건 의식처럼 매년 이어졌고, 쓸쓸한 겨울을 심심하지 않게 꺼내볼 만큼, 많은 사진을 찍게 해 주었다.

계절을 다 보낸 겨울 담쟁이가 '한 해 동안 너는 무엇을 했니?'라고 할까 봐 항상 대답할 것을 미리 준비하고 갔었다.

아쉽게도 마지막이 된 작년엔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하고 돌아왔다. 가 잘 못된 건지 담쟁이 열매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번 실망했으니, 두 번째 실망은 피하고 싶은 걸까? 다시 담쟁이덩굴을 만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더 멀리 이사를 온 이유도 있지만, 다른 망설이는 이유가 있는 듯했다.


작년보다 올해는 더 많이 걸었고, 무릎은 단단하게 서서히 단련되었다. 울컥해져 나오던 눈물은 삼십 초만 흘리면, 외면할 수 있었다. 잘라내면 끊어지는 것이 관계였고, 발길을 끊은 과거는 점점 멀리 희미해졌다.

아침은 걸러도 산책은 빠뜨리지 않았다. 글을 써야 할 이유를 온종일 찾았고, 저녁이면 글 하나가 완성되었다. 글이 책처럼 쌓이는 만큼, 겨울엔 뭔가 대단한 것이 완성될 거라는 기대로 들떠 있었다. 그렇게 모아둔 꾸러미를 담쟁이 앞에 펼쳐놓으면 할 이야기가 많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젠 그 만남이 필요 없어져버렸다. 일까?


그땐 그 의식이 필요했다. 아무도 모르게 나만의 비밀수첩도 만들어야 했다. 의논할 상대도 나를 알아주는 상대도 없었기 때문이다. 표를 위해, 평소보다 더 큰 원을 그리며 일과 삶을 조화롭게 유지하고 싶었다. 언제부터 인가 작은 것으로 만족하는 마음은 더 확장이 되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내면에 찾아온 안정감은 지난 일 년 동안 크고 작은 고통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내 감정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스며들었다.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출렁이던 감정의 바다를 큰 힘 들이지 않고도, 고요한 상태로 얼마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 사귄 담쟁이 열매를 보러 간다. 예전에 봤던 풍경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작은 담벼락을 다소곳이 지키고 있다. 담쟁이 열매를 만나면 예전보다 사진은 덜 찍고, 대신 열매를 먹으러 나온 새들을 구경한다.

겨울이면 어디서든 담쟁이 열매를 찾을 수 있다. 담쟁이열매를 만났으니, 나는 이제부터 진정한 겨울이다.


기대만큼 새롭지 않고 비슷비슷한 날이 계속되어도, 더이상 다 모르겠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이전 17화그냥 흙길이라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