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누구나 혼자다

by 무쌍

글쓰기는 나를 꼼짝 못 하게 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듯 조심스러웠다. 창피하지도 숨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달리면서 고백하다가 글쓰기에 푹 빠져버렸다.


을 계속 읽다 보면, 쓰고 싶어 진다는 작가들의 글을 많이 읽었다. 그 길에 누구든 들어설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책이 좋아 짝사랑 오래 했지만, 정작 책 쓰인 대로 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처럼, 글쓰기는 책이 좋아서 하는 흉내내기 일 뿐이었다.

작가 처럼 대단한 작품을 써보겠다는 포부가 아닌 그냥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일 뿐인데도 수치심이 가득한 아이가 말했다.

'글은 작가들이나 쓰 거야. 아무나 쓰는 줄 알아?!'

책을 읽을수록 모든 문장이 내게 삶을 써보라고 권했지만, 정작 글쓰기만 문제는 아니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의심부터 했었다. 이성이든 친구든 '왜 나를?'이 먼저 떠올랐다. 나의 수치심은 나를 초라한 기분이 들게 했다. 누구에게도 내가 사랑받을 구석이 없을뿐더러, 전혀 그럴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믿게 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게 당연하다 여겼지만, 그건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잠재된 나를 발견할 기회있었지만 방해하는 것은 바로 나였다. 그 사실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닫게 되어 다행이었다.


가방 속에 늘 바늘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구에게든 엄마 노릇을 했다. 옷을 수선해주면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 가끔은 인형도 만들고, 가방도 만들기도 했다. 더 부추겨주면 이불도 커튼도 만들 수 있었다. 러다가 이 아파서 바늘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더는 손이 못 견딜 것 같았다. 그리고 바늘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어느 날 짇고리에 있어야 할 바늘이 빠져나와 내 몸을 찔렀다. 시는 찾지 않으려고 했지만, 가끔은 바늘이 있는지 확인했다. 나는 이제 바느질 같은 건 안 한다고. 가방 깊은 곳에 반짇고리를 밀어 넣다가 또 바늘에 찔렸다.


바늘은 어쩌면 갖고 다니는 뾰족한 펜이었는지 모르겠다. 숨길 수록 나를 찌르는 날카로움은 시도 때도 없이 긴장하게 만들었다. 나를 쿡쿡 찌르는데도 버리지도 못하는 욕구는 감추는 것보다는 그냥 꺼내놓고 쓰는 이 내게 유리하다는 걸 늦게 알았다. 글 쌓일수록 어떻게 다 모른척하고 참았는지 스로에게 놀고 있다.


오래전 이맘때였다. 아이를 데리고 간 제주집은 할 일이 많았다. 집안일들은 차례차례 일정이 잡혀있었다. 나를 기다린 건 가족이 아니라 일감들이었다. 아이가 낮잠 자는 사이 비가 새는 틈을 보수하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찬바람이 휭 불어오더니 순간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뭔가 향긋한 기운이 느껴졌다.

작업을 다 하고 사다리를 내려와 보니 건너 집 화단이 눈에 들어왔다. 빨간 버베나 꽃과 분홍 제라늄 틈에 꽃이 보였다. 피어난 수선화였다. 다음날 가보니 더 꽃다발처럼 꽃송이가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꽃 주인은 못 봤지만 화단은 늘 정갈하고 우아했다. 유독 수선화는 나를 상상 속 은밀한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꽃을 볼 때마다 울컥했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운 수선화 때문인지, 서러운 내 처지 때문인지 그땐 알지 못했다.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소년이 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해 물에 빠져 죽고 나서, 꽃으로 피어났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섬뜩했다. 수선화는 꽃말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자기 사랑, 자아도취가 꽃말이 되어버린 수선화는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알고 있는 걸까? 찬바람에도 영롱한 자태였다. 름답고 랄만한 꽃을 피운 자신에게 빠져 스스로를 흡족해하고 있었다.


나도 수선화처럼 언젠간 좋아하고 싶었다. 바로 나 자신을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고 싶었다. 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 싶었다.


수선화는 그해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화단 주인은 남매를 둔 부부였는데 결혼한 자녀들과 함께 살 집을 위해 작은 집을 3층 빌라로 새로 지었다고 한다. 집을 짓는 동안 동네 사람들은 부러움 반, 걱정 반으로 수군거렸다고 전해 들었다. 선화가 보고 싶었다. 사진 속 꽃은 내게 말하는 듯했다.

" 날 기억해줘서 고마워, 그동안 너는 어떻게 지냈니?"

" 더 이상 누가 시키는 대로 살지 않기로 했어."

" 외롭지 않아?"

" 누구나 혼자잖아."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이런 말을 했다.

"언젠가 당신은 당신이 겪고 있는 일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고, 그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의 생존 가이드가 될 것이다."

치유를 위해선 나를 드러내야 한다는 그녀는 내게 적지 않은 용기를 주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이야기들은 나의 생존 가이드가 되었다. 꽃들이 그러했고, 책들이 그러했다.

꽃은 감춰진 감각들을 깨워 주었고, 글쓰기는 내가 더는 약해지지 않을 거라며 안심시켰다.

그래서 난 지금 쓰지 않으면 것 같다. 더는 못 참고 꺼내 든 펜은 쉬이 멈추지 않을 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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