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우는 아이가 있으니 나는 엄마다. 집 주변에서 인사할 정도의 지인들은 나를 아이 이름 앞에 붙여서 **엄마라고 부른다. 그리고 아이 없이 어디론가 혼자 가는 나를 붙들고 묻는다.
"아이들은 어디 갔어요?"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혼자야?"
일일이 설명하기 싫어 그냥 웃는다. 그럼 더 진지한 표정을 하고 말한다.
"아! 아빠가 쉬나 보네."
아이들 없이 혼자인 이유를 꼭 듣고 가려나 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웃는다. 함께 없는 아이들 안부가 궁금한 건 지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이 같이 없는 내게 항상 하는 인사말이다.사실 모든 인사는 그냥 하는 말이며, 일일이 대답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인 내게 건네는 말일뿐이다. 그래서 나는 웃기만 한다.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분주해진다.아이들은 날 보자마자 "엄마!"라고 반가워한다. 그럴 때면 내가 이 아이의 엄마라는 것이 실감난다. 아이들은 이제 잠이 들기 전까지 끝도 없는 엄마 찾기가 시작된다.
"엄마 뭐 먹을 거 없어요?"
"엄마 만들기 하려는데 종이 없어요?"
"엄마 TV 봐도 되나요?"
"엄마 심심해요"
"엄마 아빠 언제 와요."
모든 말 앞에는 엄마를 부르고 시작된다. 아프면 울면서 엄마를 부르기도 하고, 가끔은 그냥 특별한 이유 없이 엄마를 부르기도 한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엄마를 부른다.
그런데 남편도 집안에서 날 이렇게 부른다.
"엄마 내 셔츠 어디 있어?"
"엄마 나 밥 언제 줘?"
특히 물건을 찾을 때와 먹을 것이 필요할 때는 아이들과 똑같은 말을 한다.
마침 전화벨이 울린다. 친정엄마는 내 이름 대신 아이 이름을 붙이고 아무개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는 오늘 뭐했니?
"오늘도 엄마는 바빴니?"
신기하게도 친정엄마도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되었고 엄마라고 한다.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이들을 아빠에게 맡기고 은행을 간 날이다. 은행 창구에 대기자가 많아 잡지 하나를 들었다. 여성잡지를 들고 보니 헤어숍이나 가야 할 수 없이 보는데, 참 오랜만이다. 한참을 보다 보니, 독자 이야기가 있었다. 셋째 아이를 6살 유치원에 입학시키고, 첫날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기차를 탔다는 엄마 이야기였다. 육아에 잠시 쉼표를 찍고 자신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며, 달리기 기차에서 글을 쓰고 있다는 그녀가 참 근사했다. 그때는 둘째를 막 출산하고 수유에 지친 나로서는 도통 오지 않을 시간 같았다. 이제 아이는 한 살이니까 겨울을 보내면 두 살, 그리고 손가락으로 아이 나이를 세어 본다. 한 손가락을 다 채워야 둘째가 유치원에 갈 날이 온다니 한숨만 나왔다.
그래도 나 역시 그런 날이 오면 자유의 순간을 맞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곧 둘째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다. 여전히 나는 엄마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브런치에서 글을 날마다 올리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날마다 올리고 싶고, 노력 중이다.)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라고 사랑하라]에서 여주인공이 건 넨 말이 떠오른다.
"아이를 갖는다는 건 네 얼굴에 문신을 하는 것과 같아" 주인공의 언니가 첫아이의 젖을 물리면서 한 말처럼 나도 이미 문신이 있다. 누가 봐도 얼굴보다 문신이 눈이 먼저 들어올 것이다. 그래서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혹시 엄마가 된 나를 글로 쓴다면 나는 또 누가 될 런지 알 수 없다. 글 속에는 엄마가 아닌 엄마로 사는 내가 있다.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없는 틈이 생겼다. 전화벨이 울리지 않으면 나 혼자 있는 시간이다. 가족들은 주말 늦잠을 자고 있고, 나에게 달콤한 고독이 찾아와 줘서 몹시 설렌다.
가족 중에 누가 가장 먼저 일어나 나를 '엄마'라고 부를까? 자판소리를 조심스럽게 두드려본다. 나를 닮아 아침잠이 없는 큰 아이가 먼저 "엄마 굿모닝"한다. 그리고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일하는 내 뒤로 앉아서 스마트 폰을 꺼낸다. 주말이다. 가족들도 무얼 하든 못 본 척 눈을 감는다. 엄마는 잠시 휴가 중이고 지금은 글을 쓰는 나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