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노트

깍두기를 담그고 머리가 맑아졌다

깍둑썰기한 흰 무

by 무쌍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과 어서 다해치워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둘 다 오락가락거렸다. 나와 호랑이는 좀 궁합이 안 맞나 보다. 새해부터 활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위축된 듯 소심해졌다.


몸의 에너지가 모자란 듯하지만, 사실 뜻대로 되지 않는 마음이 원인이다. 이럴 땐 몸을 움직이는 집안일이 도움 된다. 귀찮서 미루던 살림 하나씩 하기 시작했다. 수선할 옷들을 꺼내 단추를 달고 구멍을 꿰매고, 쿠션에 솜을 채워 넣고 구멍 난 부분을 꿰맸다. 바느질은 날카로운 바늘이 일정하게 들락날락 거리며, 차분해지는 진정효과가 있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았다. 더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 필요했다.


얼마 전에 떨어진 깍두기를 담가야 할 시간인 듯했다. 깍두기를 담글 무 하나를 사러 나갔다. 직하고 완벽하게 흰 부분이 많으면서 딴딴한 것을 찾고 있었다. 마트 진열대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추운 날씨 탓인지 다행히 무를 고르는 동안 마트엔 사람이 없었다.


지난 텃밭의 풍경이 그리워졌다. 텃밭에 자라던 무를 떠올리니 더 고르기가 힘들었다. 나란히 놓여 있는 무들은 무청이 다듬어지고, 흙이 세척된 깨끗하고 흰색이었다. 자격 미달인 무가 하나도 없었다. 길쭉하게 긴 녀석도 기특해 보이고, 긁힌 부분에 곰팡이가 살짝 피었지만, 한 손으로 들기 어렵게 통 큰 녀석도 괜찮았다. 눈썹 모양으로 쪼개진 상처가 있는 무도 토실했다. 그렇게 이리저리 무를 고르며 하나하나 모양이 익숙해질 만 해지니, 맨 처음 골랐던 것이 가장 맘에 들었다.


뭐든 처음이 나은데, 이상하게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리저리 머뭇거리게 되는 것 같다. 글을 쓸 때도 처음 끼적거리고 떠오른 주제대로 쓰는 날이 고마울 때가 많다. 어쩌면 그 이야기는 쓰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감추다가 결국은 쓰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깍두기를 처음 담근 건 아이가 유치원 텃밭에서 갖고 온 무 하나 때문이었다.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서 담갔는데, 절인 무가 너무 짜서 익히고 김치찌개에 넣어서 겨우 먹었다. 사실 깍두기는 식당에서 만 먹어봤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 두기는 취급하지 않았다. 물만 많이 나고 맛이 없다며, 굳이 큼직하게 썰어 넙적한 무김치만 담그셨다. 접시에 담아놔도 작게 자르지 않고 꼭 큰 조각을 하나씩 들고 먹어야 했다. 어디까지나 부모님의 취향이었다. 그 뒤론 무김치를 잘 먹지 않았다. 여전히 고향의 무김치는 크고 먹는 식구는 정해져 있다. 식구가 두 함께 살던 시절은 알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서로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말하지 못했고, 상대방이 무슨 생각인지 들어주지 않는 듯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려진 대로 음식을 고맙게 먹는 일도 중요했지만, 마가 되어 아이들과 지내다 보니 그렇게 고집할 일도 아니었다.

잊고 있던 옛날 일들을 새록새록 더 많이 기억해 내고 있다. 나를 표현하면 할수록 내가 달라지려고 노력한다는 걸 느낀다. 나아지고 싶었다. 어린 시절을 제대로 보내지 않았던 것 같은 기분을 버리고, 앞날을 계획하며 변화를 바라고 있다.


골라온 무는 다행히 달고 맛있었다. 깍둑 썰은 무를 하나씩 집어 먹으며 칼질을 하다 보니 머리는 맑고 시원해졌다. 딱딱 소리를 내며 도마 위에선 하얗고 큰 각설탕처럼 생긴 무 조각들이 출렁거리며 쏟아졌다.

하얗게 찹쌀 풀을 쑤고, 깍둑썰기한 흰 무는 흰 소금을 넣고 절였더니, 밖에 쌓인 흰 눈만큼이나 주방도 환해졌다. 무가 절여지는 동안 이제 버무릴 양념을 준비해야 했다. 나와 내 소중한 가족들을 위해서 준비한 재료를 섞었다. 버무리고 보니 맛있는 무 덕분에 깍두기 맛 내기는 큰 도움을 받은 듯싶었다.


집안일로 고단해진 몸은 낮잠 한숨에 기운이 솟았다. 새로 담근 깍두기를 식구들과 둘러앉아 먹고 나니 다시 글이 쓰고 싶어졌다. 어른이 된 내가 자신을 잘 돌보는 법을 찾아가듯, 나만의 레시피대로 만들어진 깍두기는 가족들이 먹을 만한 적당한 맛을 내는 듯했다. 깍두기 덕분에 당분간은 든든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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