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차례가 금방 오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을 손에 넣는 데 한 달 걸렸다. 지옥 편을 빌리기 전에 연옥 편을 먼저 빌려왔지만, 얼핏 봐도 지옥 편이 훨씬 더 낡고 헌책이었다. 지옥 편을 더 많은 사람들이 만졌고, 읽었던 흔적이었다. '지옥'이란 제목과 걸맞지 않게 신곡 지옥 편은 도서관에서도 대기 순서 3번째 안에 예약을 하고 빌려야 하는 인기도서였다. 신작 베스트셀러만큼이나 손에 넣기 힘들었다.
괴롭고 참담한 상황에 놓여있어 지옥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암담한 현실이 도처에 있는 듯싶다. 마음이 만든 지옥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를 간절히 바라는 안타까운 모습도 보았다. 지옥이란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반드시 가야 하는 종교적인 의미보다, 벗어나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상황을 표현하기에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옆모습만 봐도 카리스마가 넘치고 남다른 얼굴을 한 단테 알리기에리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정치적으로 추방당하는 수모를 당한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망명생활로 지친 그에겐 지옥을 사는 듯한 괴로운 말년이었지만, 그가 쓴 신곡이 발표되자 많은 인기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망명생활에도 삶을 완성하고 싶은 그의 집념은 <신곡> 지옥, 연옥, 천국 편으로 마무리되며, 실제로 그는 천국 편을 쓰고 얼마 뒤에 숨을 거두었다.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걸 예상이나 한 듯 신곡에선 순례자가 되어 마치 고향으로 돌아간 듯 천국까지 간다.
시인으로 정치인으로 열정을 다했지만, 천국에서 자신의 연인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장면들을 보면 그도 평범한 삶을 바랐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정치인으로 최고의 권력까지 올랐다가 권력의 암투로 낙오된 그는 고국에서 추방당한 자신을 달래며 살아가야 했다. 그래서 그가 쓴 신곡은 망명생활을 견디며 다시 되돌아갈 의지를 더 단단히 해주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정말 죽음 뒤에 어디로 갔을까? 그가 쓴 지옥은 눈앞에 펼쳐진 듯 생생하고 정말 섬뜻했지만, 그는 이미 그곳을 지나 연옥으로 갔을 듯했다. 정말 신곡에 쓰인 대로 그가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내가 고향을 가지 못하는 이유는 다르지만 그에게 묻고 싶었다.
"저는 고향에 가지 않아요. 당신처럼 추방된 건 아니지만 전 고향에 갈 수 없답니다. 모두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곳이지만 전 그곳이 지옥 같거든요. 제 고향도 당신의 피렌체만큼이나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가끔은 그립기도 합니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고향을 가지 못한 이유를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
책에서 그의 심정을 쓴 듯한 문장들을 만났다.
"질투는 모든 마음이 나를 거슬리며 불타오르게 했으니, 타오르는 그 마음이 다시 왕의 마음까지 불타게 하여 나의 행복한 영예는 슬픈 통곡이 되어 버렸소."
"저 위 고요한 세상의 어떤 골짜기에서 전 길을 잃었습니다. 나이가 반평생 차기도 전이지요."
"세상의 오래된 격언은 저들의 눈이 멀었다고 한다. 과연 저들은 인색하고 질투심에 교만까지 갖춘 자들이니, 너는 저들의 행위에서 벗어나 너 자신을 깨끗이 하여라.
너의 운명은 그런 명예를 지니고 있으니.."
<신곡: 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단테는 망명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을 돌려야 했을 것이다.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면 바로 사형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바꿀 수 없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다 간 그였지만, 내가 고향을 가지 못하는 이유를 그는 이해해 줄 것 만 같았다.
오랫동안 나도 고향을 떠나 길을 읽어버린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일까? 고향이 어딘지 묻는 질문을 싫어했다. 유난히 별난 고향이라서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을 들어야 했다. 나는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얼마나 맛있는지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 친구들을 다 갖고 있지만 나만 없는 이유를 혼자 알고 있어야 하는 기분이었다.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밖으로 나가면 비밀이어야 했다. 숨기는 일에 익숙해지자 나는 더 홀로 남겨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고향을 가는 것이 더 불편해졌다. 고향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더 이상 없으니까. 아직도 귤밭에 아버지가 일을 하고 계실 것 만 같다. 내가 고향을 찾지 않는 이상 아버지는 매일 아침 밀감밭에 귤나무 사이를 걸어 다니고 계신 것 같다. 아이들은 엄마의 고향이라고 좋아하지만 아직도 난 고향 소식은 듣고 싶지 않다. 고향의 이름만 들어도 복잡한 감정들이 곧바로 나를 공격했다. 방법이 없었다. 가능한 고향에서 멀어지고, 연결되지 않는 편을 택했다.
단테처럼 억지로 추방된 것이 아닌 나의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테와 다를 것이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신곡>의 지옥 편에서 단테는 가까운 친척과 지인들을 만났지만 도와주거나 데리고 나오지 않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들은 이미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질투에 눈이 멀어 죄를 지은 자들과 욕망을 쫓다가 온 망자들이었다. 다시 그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이 쓴 지옥이란 곳은 현실에도 있는 것 같아요. 전쟁과 바이러스 보고 싶지 않고 냄새가 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
과연 지옥이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로 설명 가능한 곳일지 궁금했다. 그는 대답처럼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옥이 모든 바위들이 내리누르고 있는 저 슬픈 구멍에 잘 들어맞을 거칠고 쓰디쓴 글을 지을 수 있다면 내 생각의 즙을 더 완전하게 짜내련만, 하지만 그렇지 못하여 두려움 없이는 말을 이어 갈 수가 없다.
<신곡: 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지옥 밖으로 나와 별을 다시 보게 되었다. 모두가 내 탓을 하며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것 같은 날이 있었다. 나도 익숙한 누군가의 손을 잡기보다는 나만의 꿈이 먼저였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를 찾기 위해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고 믿고 싶었다.
<신곡>을 처음 읽었을 땐 시인으로 단테가 궁금했는데, 또다시 책을 펼치니 단테가 어둠의 숲에서 깨어나 걸어간 그곳은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온갖 불안이 만든 상상 속의 형체도 없는 걱정들을 떠올리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지옥이란 삶을 마지막으로 두고 떠날 때가 되어야 알 수 있는 것만은 아닐지 모르겠다.
단테의 신곡 중에도 시대를 초월하는 지옥 편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과거에 악몽 같은 나의 기억도 영감이 되어 나의 글이 되어준다면 나에게도 위안이 될까?
이미 어른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 겪은 일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나를 우울한 방에 몰아넣는다. 나약하고 힘없던 아이가 굳게 입을 다물고 살아야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동안 지옥 같은 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끔찍했다. 내면에 남은 그림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만, 글을 쓰며 서서히 밝은 곳에 더 머무는 법을 알게 되었다.
지옥은 단테가 보았던 그대로일까? 잠시 지옥을 벗어난 듯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살아 있는 동안 그 지옥이 생각날 것이다. 선명한 기억 속에 지옥은 분명 있었고, 과거에 내가 겪은 시간보다 훨씬 더 무섭게 느껴졌다.
단테의 <신곡>의 지옥 편을 덮으며 내가 살던 지옥도 당분간 책 속에 숨겨두기로 했다. 내가 일부러 펼쳐보지 않는 한 그 지옥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