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는 것이 가장 편하다.
그런 내게 책과 자연이 좋은 친구가 된다. 그 친구들은 혼자 있길 좋아하는 나를 더 은밀한 곳으로 데려가 영혼의 충만함이 뭔지 일깨워 준다. 어린 시절 귤밭에서 자란 나는 동화책과 귤밭 야생화가 유일한 놀잇감이었으니, 놀이만큼은 어른이 되어도 포기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중요해졌다. 사람들 앞에선 불편한 기분을 감추고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앞가림을 할 나이가 되자, 타인을 인식하는 내 태도가 불편해졌다. 그 감정이 어떻게 내 안에 자리 잡은 것인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나 홀로 있을 때는 느껴지지 않지만, 누군가 앞에선 수치심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가족, 친구 할 것 없이 관계 속에선 늘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신경 쓰였다.
우연히 두 가지의 심리진단검사를 하게 되었다. 하나는 다면적 인성검사(MMPI -2 미네소타 다면적 인성검사)였고, 또 하나는 문장 완성검사(SCT Sentence Completion Test)였다. 다면적 인성검사는 500개가 넘는 질문지였는데, 평소 활자를 좋아하는 나였지만 답을 작성하는 일은 좀 피곤했다. 생소했지만 문장 완성검사가 한결 나았다. 쓰인 문장을 이어서 완성하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어 이런 식이 었다. "나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을" 그리고 다음 문장을 완성하는 식이었다. 상담사가 하라는 대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떠오르는 걸 썼는데, 모두 50개의 문장을 다 완성해야 했다.
문장 완성검사는 글쓰기나 퇴고하는 기분과는 달랐다. 어울리는 문장을 떠올리는 것도 아니었고, 오직 진단을 위한 문장 완성이었다. 내가 느끼는 걸 문장 속 주어진 상황이나 대상을 표현하는 식이었다. 막상 다 채우고 나니 내가 회피하고 있던 대부분의 것들이 글로 쓰여 있었다. 어쩌면 그런 것을 진단하기 위한 것인 듯싶었다. 열흘이 지난 후 나는 결과지를 받았다.
심리진단 결과지 맨 윗줄에 쓰여있는 "성격적으로 평가에 매우 예민한 사람"이란 문장을 봤을 때 더는 피할 수 없었다.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거절당하기를 두려워하고, 자신이 비난받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며 솔직한 감정이나 의사표현을 자제해왔을 듯...
이렇게 이어지는 긴 문장들이 전신 거울처럼 나를 한눈에 보여주었다.
자꾸만 '타인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 건 타인의 평가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를 설명해주는 문장 뒤에 숨어 있던 수치심은 부정적인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감정을 숨겨야 하고, 누군가를 만나 관계를 맺을 때 웃는 가면을 쓰는 것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에 장애가 되었다. 새롭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나를 이용하려고 드는 건 아닌지, 때론 내가 한 말로 그들의 기분이 나쁜지 확인해야 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해야 했지만, 꼭 겪고 나서야 알았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을 가진 것은, 더 깊은 곳에 '수치심'이 문제였다. 어린 시절부터 긴 시간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지만 달라지고 싶었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 사람들이 경험에서 얻은 이런 말들은 내겐 명언처럼 새겨졌다.
타인의 시선이 중요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멀리하세요.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말이에요.
시인으로 살길 바랬던 헤세는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자신의 삶은 거대한 장애물 때문에 괴로워했다. 세계대전이 벌어진 동안 조국에서 쏟아지는 비난을 견뎌야 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인과 아들까지 병으로 깊어지자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었다.
헤세는 칼 융의 진단이 필요할 만큼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미 써놓았던 <싯다르타>를 완성한 건 정신적인 치료를 받은 후였다. 출가한 싯다르타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은 작품을 완성하면서, 헤세 자신도 순탄치 않은 삶을 수행자처럼 견뎌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이길 바랬던 그였기 때문일까? 책 서문엔 그가 싯다르타의 이야기를 인도의 시라고 소개한다. 곧 왕이 될 몸이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싯다르타를 바라보며, 진정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니 난 부럽습니다. 자식의 길을 막지 않는 아버지와 자식을 바라보는 모든 눈길이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왕자의 자리까지 버리고 떠난 싯다르타 당신이 말이에요. 누구도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데 왜 혼자서 외로운 길을 떠나셨나요? "
헤세는 싯다르타가 자신의 삶을 떠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모두가 싯다르타를 사랑하였다.
그렇지만 싯다르타 자신은 스스로에게는 기쁨을 주지 못하였으며 스스로에게는 즐거움의 원천이 되지 못했다.
내면에 불만의 싹을 키우기 시작했다.
영혼은 안정을 얻지 못하고, 마음은 진정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나는 어려서부터 독립할 때가 되면 고향에서 가장 멀어지고 싶었다. 그래서 고향을 일찍 떠나왔지만 혼자 빠져나온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홀로 지내면서 누구도 나 자신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라온 환경이 별로 였다고 과거만 탓할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은 결국 스스로 채워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설령 나의 수치심이 누군가 때문에 생겼다고 해도 내가 상황을 선택할 수 있듯이 내가 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싯다르타가 왕자 자리를 버리고 떠난 것처럼, 내가 바라는 것도 내가 살아온 조건들을 버리고 싶었던 것일지 모르겠다.
그래도 싯다르타가 진정한 내면을 찾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과의 충만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하고 떠나는 싯다르타를 헤세도 비난하지 않은 듯했다.
내가 고향을 떠난 죄책감을 붙들고 있는 것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집을 빠져나와 멀어지고 싶었던 속마음을 들킬까 봐 두려웠지만 무엇보다 내가 원하던 자유였다.
지난날이 후회되어서 일까? 내 인생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빨리 찾아서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그런데 싯다르타가 내면의 선을 찾지 못하고 고통스러웠을 때 나도 비슷한 상황에 잠시 머물렀다는 것을 발견했다.
싯다르타는 뱃사공에게 자신의 내력과 인생을, 그리고 오늘 바로 그 절망의 순간에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 자기 눈앞에 어떻게 나타났던가 이야기하였다. 밤이 이슥할 때까지 그의 이야기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자신을 고백한다는 것,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느꼈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그래서 나도 싯다르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전 출생의 제비뽑기에 운이 없었다고 생각했어요. 감히 누구에게 말을 털어놓을지 몰랐지요. 결혼한 남편에게도 두 아이를 낳고 나서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삶을 그대로 살 수 없었어요. 내 머릿속에 유령이 사는 것 같은 기분은 아주 오래된 일이에요. 늘 눈치를 보고 있었나 봐요. 하지만 난 내 의지대로 삶을 선택할 수 있었어요.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아서 두려웠지만요.
예전의 삶을 버리는 시련이 나를 변하게 했어요. 사랑받지 못해서 서글프기도 했지만 인정과 사랑받을 기회를 완전히 버려야 해서 힘들었던 나를 인정하게 되었어요. 그러고 나니 오히려 시련은 다른 걸 일깨워주었어요. 바로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더 이상 나를 다그치치 않기로 했어요."
그렇다. 답을 내는 것은 나였지, 다른 누군가가 아니었다. 과거를 버렸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배운 것이 있었고 작은 성취도 있었으니 말이다. 나만 아는 시련이었지만, 결국 내 삶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인정받고 보상을 받으려고 과거와 같은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걸렸지만 더 이상 수치스러운 감정은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서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지혜는 말로는 가르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헤세는 직접 <싯다르타>를 집필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이 깨달음을 나는 일생에 꼭 한 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싯다르타다.
- 헤르만 헤세
마음의 치유는 그동안 읽었던 문학 작품들을 새롭게 다가오게 했다. <싯다르타>가 비록 헤세 자신의 삶을 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가 써 내려간 글은 오래된 지혜처럼 느껴지게 했다. 헤세 자신이 아픈 시간을 마침내 견뎌낸 증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다시 꺼내보기 시작했다. 작가들이 자신의 굴곡진 삶을 문학으로 풀어내려고 노력했다면, 내 삶도 그들의 문장에서 시작해보고 싶었다.
겨울 끝에 온 입춘이다. 곧 씨앗이 껍질을 깨고 싹이 돋아 날 것이다. 봄의 시계는 째깍거리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싯다르타>를 다시 읽고 나니 봄을 맞이 하는 마음도 여유가 생겼다. 곧 봄이 올 거라는 기대감은 나의 치유도 느리지만 여유를 갖게 해 준 듯하다. 봄꽃이 필 때까지 자연이 보여 주는 깊고 차분한 겨울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어졌다. 겨울을 충분하게 견뎌야만 아름다운 꽃밭을 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