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이 없는 책을 남긴 법정스님과의 대화
무소유
상한 치즈 봉투를 남편에게 들켜버렸다.
검푸른색으로 무늬가 생긴 치즈 조각이 무서운 바이러스를 옮기는 병균처럼 소름이 돋았다. 음식 버리는 것을 신경 쓰는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냉동을 시켜둘걸 미루다가 냉장실에서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게 된 치즈를 보니 미안해졌다. 웬만해선 작은 봉투에 든 식료품을 사지만 이렇게 버리는 날은 쓸데없이 낭비한 듯 속상하다.
고향을 떠나 자취를 하는 동안 두 동생이 대롱대롱 양쪽 다리에 매달려 있는 기분으로 십 년 가까이 맛을 봐서인지 형편대로 살림하는 것이 익숙했다.
남편을 만나 단둘이 먹고사는 살림은 오히려 넉넉한 듯 여유가 생겼다. 신기하게도 세 식구가 둘로 줄어든 기분은 날씬해져 몸이 가뿐해진 것만큼 가벼웠다. 아이가 생기자 다시 살림은 사람 수 대로 늘어났고, 온 집안을 뒤덮은 물건들로부터 수시로 도망가고 싶어 졌다.
지극히 작게 가볍게 지내고 싶지만, 나만 살지 않는 공간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냉장고를 덜 채우려고 해도 음식이 상해서 버리는 일은 생겼다. 정 반대로 쓰지는 않고 보관만 하는 물건들도 있다. 혹시 모를 상황 때문에 모셔두는 물건들 말이다. 수납장이 모자라면 필요 없는 것을 쌓아두기만 하는 건 아닌지 한심해지기도 했다. 자리만 차지하는 물건들을 보면 답답하고, 다 쓰지도 못하고 버리는 아까운 마음까지, 이럴 때마다 그분이 떠올랐다.
법정스님이 입적하시던 해에 다큐 방송을 보고 한동안 내 가족이 떠난 듯 허전하고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생전에 여러 차례 짐을 정리하는 스님의 모습은 아직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유품이 되기 전 물건을 나누어 주며 홀가분히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다.
오랜만에 스님의 책을 펼쳐 보니 스님 얼굴을 보며 말씀을 듣는 듯 고요해졌다. 그러다 불편한 속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스님 어쩌다 보니 스님 책이 한 권만 남았습니다. 빌려간 사람은 있지만 책은 돌아오지 않네요. 여기저기 흩어져, 되돌려 받지 못하고 그만 놓쳐버렸어요. 예전부터 전 물건을 잘 간수하기 어려웠답니다. 달라는 대로 주지 않으면 내가 불편해질 것 같았어요. 내 약점은 가족이었어요. 가족은 힘이 되기도 했지만, 날 어렵게 만드는 존재였어요. 전 물건들보다 가족들의 마음이 편해지는 걸 더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내 마음이 편하고 싶어 졌어요. 차라리 돈이나 물건을 지켰다면 더 빨리 자립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이런 내 마음을 타일러 주시는 듯 스님의 책 속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물건과 인연을 맺는다. 물건 없이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이루어질 수 없다. 동시에 우리들이 겪은 어떤 성질의 고통은 이 물건으로 인해서 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중에도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물건 자체에서보다도 그것에 대한 소유 관념 때문이다.
자기가 아끼던 물건을 도둑맞았거나 잃어버렸을 때 그는 괴로워한다. 소유 관념이란 게 얼마나 지독한 집착인가를 비로소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물건을 잃으면 마음까지 잃은 이중의 손해를 치르게 된다.
- 법정 스님의 <무소유>
스님의 말씀이라 귀담아 들었지만, 난 물건이나 돈보다 더 잃고 싶지 않은 관계를 지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님은 이렇게 다시 말했다.
"어떤 인연으로 해서 내게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가 버린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나의 실체도 없는데 그밖에 내 소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 한동안 내가 맡아 있을 뿐이다."
잠시 어지러웠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니,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의 불편했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찾아왔다. 작고 소중한 아이들을 보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늘 내 말에 편을 들어주는 남편을 보며 '가족들은 왜 날 받아주지 않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성을 한 듯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가족들에게 더는 듣고 싶은 말이 없어졌고, 나도 더 할 말이 사라졌다. 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실체도 없는 가족애를 붙잡아 보려고 했던 나를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나는 관계도 물건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으니 말이다. 가족에게 느껴지는 사랑은 구걸하거나 만들어지기보다는 뿜어져 나오는 태양처럼 늘 드리워져 있는 것이었다. 잠시 먹구름이 가리고, 안개가 깔리더라도 다시 환한 빛을 보이며 안아주는 다정함이었다.
어느 날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식구들과 내게 들고 오는 물건이 반갑지 않았다. 커피를 좋아하는 난 인스턴트커피나 원두커피는 무조건 고마운 선물이었지만, 그건 유통기한이 임박하거나, 아예 몇 달씩 지난 것이었다.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닌 남는 것을 처리하는 듯한 물건들이었다.
세트로 받은 화장품은 냄새가 이상해서 보니 이미 유통기한이 반년도 훨씬 지난 것이었다. 책이라면 뭐든 좋아했지만, 이미 읽은 건지 혹은 읽고 싶은지 묻지 않고 두고 갔다. 때론 읽은 책이라고 했지만 들고 오기도 했다. 상표가 달려 있어 새 옷을 들고 온 줄 알았는데, 교환할 날짜가 지나버려 바꾸지 못한 옷이었다. 포장은 뜯지 않았지만 온전한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스님, 얼굴 보며 상대할 때는 모르겠더니, 버리듯 두고 간 물건을 보니 꼭 내 존재 같았어요. 내게 준 물건처럼 가족들에겐 내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었나 봐요.
그걸 알게 되었을 때, 예전처럼 받을 수 없었고 그 상황이 불편했어요.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지만, 오히려 억지로 떠넘기려고 했으니까요. 그럼 마지못해 받았어요. 그런데 스님, 지나고 보니 내게도 문제가 있던 것 같아요. "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사람의 마음처럼 불가사의한 것이 또 있을까.
아니꼬운 일이 있더라도 내 마음을 나 스스로가 돌이킬 수밖에 없다. 남을 미워하면 저쪽이 미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진다. 아니꼬운 생각이나 미움 생각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그 피해자는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간다면 내 인생 자체가 얼룩지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대인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인생을 배우고 나 자신을 닦는다.
맺힌 것은 언젠가 풀지 않으면 안 된다.
법구경에는 이런 비유가 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
이와 같이 그 마음씨가 그늘지면 그 사람 자신이 녹슬고 만다는 뜻이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방향으로 항해하는 나그네들 아닌가.
- 법정 스님의 <무소유>
스님 말씀을 듣고 나니 그 물건을 거절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불쾌했던 내 마음도 문제였다. 처음은 거절 못했어도 두 번째엔 분명히 싫은 내색을 했어야 했다. 그대로 놔두니 이상한 물건을 받으며, 관계도 이상해진 듯했다. 스님 말씀처럼 나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고, 더는 못 견딜 것 같았다.
내게 벌어진 일이 물건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관계에 얽매인 내가 못 견딘 것이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커피만 문제가 아니었다. 실체도 없는 기대와 미움들이었다. 앞으로 똑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될 것 같았다. 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도 그들도 마지막이 같은 나그네인 것은 맞으니까 말이다.
훗날 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다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용기도 없음을 알고 더 좌절했다. 애초에 싫다고 할 수 있었다면 아프지 않았을 텐데, 다시 또 과거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상담가의 조언보다 더 강력한 방법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더 멀리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는데 열중하고 싶어졌다. 더는 그들이 내게 왜 그랬는지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무 때나 불쑥 슬픈 얼굴로 찾아오는 과거의 나를 만나야 했고, 매번 괜찮다고 다독이며 나를 달래야 했다.
똑같은 상처를 치료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자신을 어루만져 주어야 했다.
한꺼번에 크게 잃어버렸다고 우울했지만, 새 삶은 바닥에서 꿈틀 되듯 시작되었다. 뚝 부러진 가지처럼 아픈 가지에 작은 새싹이 올라왔고, 지난날들은 촘촘히 뿌리내려 홀로 견딜만하다고 느껴졌다. 아주 느리지만 과거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감춰진 감정들과 앞으로의 나를 글로 쓰며 살 수 있다면 말이다. 내 것들을 잘 쓰는 법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글쓰기를 내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게 할 수 없었다.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손가락을 움직이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하룻밤 달콤한 꿈처럼 상상만으로는 글을 남길 수 없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은 유통기한도 필요 없는 향기로운 삶을 써놓고 가셨는데, 먹지도 못하는 유통기한이 지난 커피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스님 말씀을 곱씹고 되새길 시간에 그들의 태도에 분노하고 미워하며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똑같은 하소연만 시끄럽게 떠들기만 했나 보다.
글을 하나를 쓸 때마다 내 안에 미운 것을 찾는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가 아니라, 내가 글을 쓸만한 사람인가를 뒤돌아보게 한다. 내 것을 모두 다 빼앗겼다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나 보다. 내가 물건이나 돈을 그들에게 주었다고 해서, 내 소유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겪은 일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조심할 수 있어야 했다. '그냥 먹으면 돼' 한마디가 불러들인 과거의 매듭이 꼬여서 유통기한이 지난 커피를 계속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상한 물건, 버리지 못한 물건, 귀찮은 일들이 자석처럼 붙어서 내게로 왔던 모양이다.
아무것이나 받으면서 자란 곰팡이 핀 감정들을 도려내야 했다. 나와 그들과의 관계도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나 보다.
스님 말씀을 떠올리며, 나도 하루에 하나씩 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나를 그리고 내 삶을 한없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