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기다린다

여름 야생화

by 무쌍

여름이 왔다는 건 아이들의 이마가 알려준다. 촉촉해진 아이의 이마에 풀로 붙인 듯 머리카락이 딱 붙었다. 언제 여름이 왔을까. 실한 매실이 풍기는 향내가 마트 매대에서 맡아지는 걸 보니, 태양이 할 일은 이미 끝이 난 듯싶다. 산책로에서 마주친 바람은 시원한 온도가 느껴졌지만, 내리쬐는 태양에 달아른 몸에서 나는 땀은 사라지지 않았다.

바다가 그리웠다. 제주로 가는 마음을 따라갔다. 고향 제주는 건강한 바람이 많다. 한라산 계곡에서 부는 바람, 오름 위의 바람, 돌담 사이로 부는 바람, 귤나무 사이 고향집 주변에 부는 익숙한 바람... 떠오르는 대로 바람을 따라가고 싶어졌다.

걷는 내내 멈추지 않고 바람이 불었지만, 수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바짝 마른 공기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목이 마른 듯 갈증이 났다. 짭조름한 바다 위에 부는 파도치는 공기 한 모금 마셔봐도 좋으련만,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목마름으로 바뀐 듯싶었다.

그러고 보니 목이 마른 건 나만은 아닌 듯싶다. 사람들은 목마른 화단에 물 쏟아 넣고 있어도 잡목들과 화초들은 시들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틈에 아무 일 없는 듯 싱싱한 꽃들이 보였다. 담장에 걸린 능소화도 생생하게 피었고, 에키네시아와 루드베키아, 천인국이 화단의 빈 곳을 하나씩 채우기 시작했다. 바짝 마른 공기 속에 쩡하게 버티는 것은 여름의 야생화들이었다.


여름꽃들은 무척 힘이 세 보였다. 강렬하고 씩씩한 태양을 닮았다. 꽃들도 자신의 태어난 계절을 알고 있는 것처럼 고개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 여름 꽃은 젊고 힘이 넘치지만, 여름은 나를 매번 긴장시킨다. 몸은 금방 지쳐버리고 뭐라도 먹지 않으면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온이 올라갈수록 안도 뜨거워지며 뭔가 해야겠다는 정이 느껴지만, 몸은 자꾸만 어디론가 숨고 싶어 진다.


에키네시아, 천인국, 루드베키아(2022.06.05)

삼십 년도 넘게 보지 못한 사촌 동생이 말기 암환자라는 소식을 들었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지낸 동생이 부모 품에 돌아갔으니 그나마 안심이었다. 제주의 바람은 몸도 마음도 지친 이들에게 치유의 힘이 있으니 동생에겐 더 큰 효염이 있을 것이다. 더 마법 같은 힘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모두 각자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믿고 싶다. 한참을 바람 부는 대로 걸었고, 모두가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다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 남쪽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하늘은 어둑해졌고, 여름 장마도 곧 시작될 것 같다. 제주에서부터 시작된 비구름이 계속해서 북으로 올라온다면 서울에도 같은 바람이 불 것이다. 남쪽에 부는 바람은 촉촉하게 수분을 머금은 바람이었다. 내가 그토록 찾고 있던 바람이었다. 여름 내내 나는 바람이 부는 곳을 찾아다닐 것이다. 내면이 깊숙이 숨겨둔 것을 꺼내기 위해 나를 몰아세우면서 말이다.

내가 있던 곳, 남쪽에서 부는 바람을 기다린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봄망초 꽃에게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