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다. 집안 베란다 텃밭상자도 봄 농사를 끝내고 여름을 맞이했다.텃밭만큼 풍성하지 않지만 집안에서 키우는 작은 텃밭상자는 쓸모가 많다. 흙을 보면 뭔가를 키우고 싶어서 안달 나는 내 욕심을 알맞게 유지시켜주며, 큰 노력 없이도 서너 종류의 채소들을 직접 키우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으니 말이다.
텃밭상자도 계절에 맞춰서 텃밭과 비슷하게 작물을 키울 수 있다. 그렇지만 비바람 맞고 태양과 눈을 맞춰 자연 그대로 크는 텃밭 작물에 비하면 결과물이 턱 없이 보잘것없다. 먹을 만큼 수확도 할 때도 있었지만, 딱 맛만 볼 정도로 결실을 맺는다. 텃밭은 먹거리를 직접 키우지만, 텃밭상자는 화초 키우기와 비슷하다.
화초가 꽃을 피워도 즐겁지만, 채소 씨앗을 심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우는 건 훨씬 남다른 능력을 갖은 기분이 들게 했다. 거창하게 꾸며대는 듯 하지만 뭔가 탄생시켰다는 자부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난봄에 심은 당근 씨앗은 속아주기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발아가 좋지 못했다. 그래도 당근 싹은 모두 보송하게 잎을 세웠다. 쭉쭉 뻗어 올라온 줄기는 끝이 덥수룩해지면서 초록 꽃다발처럼 자랐다. 병충해가 거의 없는 당근이라 그런지 늘 푸른 소나무 잎 같았다. 토마토 잎처럼 진하지 않아도 당근 잎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는 건강한 기분이 들게 했다.
분명 텃밭상자에 당근 씨앗을 심었데, 수확하기 전까지는 화초 키우기와 다를 것이 없었다. 초록잎 구경만 했지, 땅속에 당근이 자라는 걸 볼 수 없으니 말이다. 다만 흙을 파보지 않아도 줄기가 점점 풍성해지니 당근을 별 탈 없을 듯했다. 아니 별 탈 없기를 바랐다.
당근 어깨가 나왔습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당근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근 어깨를 떡 하니 땅 위로 올린 채 '나 여기 있어요!' 하고 불렀다.
당근 잎과 뿌리 사이가 제법 갈라져 편편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트에서 파는 당근 크기는 아니라도 잘 크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당근이 통통해지길 기다렸다.
장마가 다녀간 화단은 폭우에 풀과 꽃들이 드러누웠는데, 집안에서 온실처럼 자라는 식물들도 몸살을 앓았다. 환기를 신경 쓰고 물 주기를 조절했지만, 습한 고온에 채소들도 백기를 들었다. 호랑이콩은 제대로 여문 콩 말고는 콩깍지가 자라다 그냥 말라버렸고, 바질은 꽃 필 때까지 보고 싶었지만 벌레들의 잔치가 벌어졌다. 오이 덩굴도 절반은 시름 거리며 견디지 못할 듯하다. 당근 잎도 비상이 걸렸다. 걱정했는데 벌레들이 먹기 시작했다. 아픈 잎을 속아주며 기다렸지만 계절이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었다.
막상 당근을 뽑아 내려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좀 더 키워볼 수 없는지, 제대로 자라긴 했는지 말이다.
텃밭도 봄에 심은 당근을 지금쯤 수확하는데, 장마가 끝나고 나면 바로 가을 당근을 파종한다. 당근은 일 년에 두 번 수확할 수 있다. 재배기간이 길긴 하지만 그만큼 기다린 보람을 주는 당근은 장점이 많은 채소다. 파종하기 전 땅에 충분히 거름을 잘해주어야 하는데, 작은 텃밭 상자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새 배양토를 사다 넣어주고, 액체비료와 쌀뜨물, 그리고 날마다 들여다보는 관심뿐이었다.
지난번 텃밭에선 당근 키우기가 쉽지 않다는 걸 배웠다. 제대로 자란 당근은 달랑 하나가 수확이 전부였다. 이번 수확물은 그에 비하면 개수가 더 많았다. 당근 크기는 텃밭에서 자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지만, 모양도 그럴듯해서 피터 레빗이 들고 있는 당근처럼 귀여웠다.
당근이 있던 자리엔 나팔꽃을 씨앗을 심어볼까 했는데, 장마만 지나면 또 가을 당근을 파종해야겠다. 아껴둔 제주 당근 종자를 꺼내보니 멀쩡해 보였다. 오래 묵은 씨앗이라 장담할 수 없지만, 딱 텃밭상자에 키울 만큼만 자라주면 좋겠다. 가을 당근을 수확하고, 월동한 당근이 꽃을 피우는 것도 본다면 텃밭이 부럽지 않을 듯하다.
작은 텃밭상자는 텃밭 농부가 되고 싶은 욕구를 작게 만들어 버린 줄 알았는데, 더 많은 시도를 해보게 하는 통 큰 상자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