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었다. 여태껏 복권을 살만한 꿈을 꾼 적 없지만 지난밤 꿈은 횡재한 듯 기분이 좋았다.꿈은 아침이 되어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꿈속에 나는 집안 텃밭상자를 손보고 있었다. 울창하게 자란 덩굴틈에 잘 자란 오이가 세 개나 달려있었다. 오이를 따려고 잡았는데 그만 잠에서 깼다.
'어머, 설마 태몽 같은 건 아니겠지?'
채소나 과일을 따는 꿈은 보통 그렇게 해석되던데 곤란했다. 정말로 많이 곤란했다.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집안에 오이가 자라고 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텃밭상자를 찬찬히 살피던 내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세상에! 노란 오이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입을 다문 꽃봉오리와 막 핀 듯 귀여운 꽃이었다. 모두 합쳐 세 송이 었다. 간밤에 꿈은 오이꽃 세 송이가 피었다고 알려주려고 했었던 것 같았다. 매일 물을 주고 살폈는데 꽃이 핀걸 눈치 채지 못했다니, 꿈을 꾸고 나서야 보게 된 것이 참 신기했다.
오이꽃(2022.06.09 텃밭상자)
오이 키우기는 처음이다. 텃밭을 할 때도 오이는 키워보지 않았다. 공동텃밭엔 덩굴작물을 심지 못하게 하는데도 키우는 밭을 보며 내심 아쉬웠었다. 올봄 아이와 씨앗봉투 판매대에서 한참을 고심한 끝에 데리고 온 씨앗이었다. 아이는 돈 낭비 같다며 끝까지 나를 말렸지만 꼭 한번 키워보고 싶었다. 실패하면 아무도 모르게 덮어 둘 작정으로 팻말도 없이 텃밭상자 한 귀퉁이에 숨겨두듯 씨앗을 심었다.
우여곡절 끝에 싹이 올라왔지만 호박이나 수세미인 줄 만 알았다. 한 번도 키워본 적이 없으니 심은지 한 달도 넘은 싹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웃 브런치 작가님이 알려주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이는 줄기가 길어지고 새 잎이 나면 잎 뒤로 덩굴손이 나온다. 덩굴손은 천천히 지지대와 줄을 잡으며 위로 올라가고 있다. 작고 노란 꽃은 수박꽃이나 멜론 꽃과 닮았는데, 과일을 먹고 남은 씨앗을 버리기 아까워 심어 본 적이 있어 익숙했다. 이 꽃이 오이가 될지도 모른다니 한송이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꽃은 하루가 지나자 똑 떨어졌다. 대신 다른 한송이가 피었다. 제대로 키워낼지 모르지만 벌과 나비 대신 내 손으로 오작교 노릇을 해야 한다. 인공수정을 해야 한다니 고수들의 비법을 찾아봐야 했다.
검색해보니 나처럼 집 안에서 오이를 키우는 분들이 제법 많았다. 오이는 생각보다 야무진 채소였다. 덩굴로 자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열매가 달린다고 한다. 꽃이 모두 세 송이가 피었는데 모두 수꽃이었다. 열매가 달린 암꽃이 언제 필지 기다려봐야 한다. 순을 따주거나 인공수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한여름 베란다의 뜨거운 기온을 잘 견뎌준다면 시원한 초록 커튼으로도 손색이 없을 듯싶다.
몇 해 전 수세미를 키웠는데 베란다를 뒤덮어 이불빨래를 널 공간이 없을 지경이었다.노란 꽃이 수없이 피고 지더니 늦가을 수세미 열매 하나가 달렸다. 안타깝게도 겨울은 와버렸고 열매는 크지 못하고 곪아버렸다. 대신에 달처럼 노랗고 큰 꽃을 실컷 구경했고, 열매까지달려서 즐거운 추억을 남겨주었다.
산책을 나섰다가 일부러 동네 텃밭 구경을 갔다. 오이 덩굴을 키우는 밭마다 오이가 풍년이었다. 충분히 해를 맞고 자라서 인지 줄기도 굵었고, 잎사귀도 얼굴만 했다. 마트에 파는 크기의 오이가 여기저기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집안 텃밭상자에 막 피어난 오이꽃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오이꽃이 오이가 되는 걸 기대하기엔 재배조건이 너무 열악했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오이꽃에게 더 고맙고 애틋했다.
동네 텃밭엔 오이가 풍년이다(2022.06.10)
'오이꽃! 반가워. 간밤에 꾼 꿈 때문에 놀랐고, 꽃이 고와서 한번 더 놀랐단다. 너에게 큰 기대를 하고 싶지만 오이는 마트에서 사 먹을 테니 걱정 마.'
오이꽃 덕분에 여름이 덥지만은 않을 듯싶다.
'언제면 암꽃이 필까?' 기다림 만으로 일상이 충만해졌다.텃밭상자는 작고 소박하지만 매번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