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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Nov 14. 2022

치킨 먹는 법을 새로 배웠다

후라이드 치킨

 아이들은 치킨을 좋아한다. 부분 치킨이 피자를 이긴다. 

 

생닭을 사다가 백숙을 하거나 볶음탕이나 찜닭을 만들어도  대접을 받지 못한다. 아이들은 닭요리를 잘 먹으면서도 "치킨이 먹고 싶다."며 치킨 타령을 한다. 내 입맛에도 튀김 닭은 모든 부위가 맛있고, 특유의 고소한 냄새는 거절하기 쉽지 않다.


 치킨집에선 짜장면과 짬뽕처럼 옥신각신 할 필요가 없다. 후라이드 치킨과 양념 치킨 반반을 산다. 후라이드 치킨만 파는 치킨집에선 꼭 양념 소스를 추가로 사거나 집에서 양념소스를 만든다. 두 가지 맛을  먹기 위해서 다. 우리 가족의 치킨 취향은 당분간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하다.

 

 런데 치킨을 먹을 때 마주하는 딜레마, 그건 각자의 취향에 따른 부위 선택이다. 인기 많은 닭다리 때문에 닭다리만 따로 사다가 튀겨 주기도 했지만, 엄마 솜씨보다는 사 먹는 치킨이 훨씬 맛이 좋다는 건 아이들이 더 잘 알았다. 


 요즘은 두 마리를 한 세트로 파는 치킨이 흔해졌다. 양 많아서 남은 치킨을 2-3일 반찬처럼 먹어야 하지만 마다할 이유가 없다. 격이 착하고 한 세트를 사 와도 닭다리와 날개, 튀김 조각이 4개씩 나온다. 이들은 심 닭다리를 더 먹고 싶어 하지만 꾹 참는다. 치킨 조각을 나눠어야 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분에 굳이 나서지 않아도 내 몫의 닭다리가 다.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똑같이 먹는다는 것은 내가 자랐던 가족 분위기에선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다.


 초등학생이던 시절 아빠가 통닭 한 마리를 사 오셨다. 누런 포장 종이는 이미 기름이 흥건했고,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기며 뜨거운 튀김 냄새에 황홀했다. 시장 골목에서 보기만 하던 층층이 쌓인 통닭을 처음 맛본 날이었다.  한 마리 닭엔 닭다리가 두 개, 닭 날개도 두 개였지만 다섯 식구 맏이였던 내 몫은 없었다. 동생들이 끼어들고 다리날개 주인이 정해지자, 나는 하얀 가슴살 떼서 소금에 찍어 먹었는데, 계속 손이 갔다. 겉 부분에 겨진 부분은 바삭하게 맛있었다.


그 후로 닭다리를 먹지 않았다. 먼저 먹으려고 나서지 않았고, 오래전부터 몸에 배어서 인지 스스로 닭다리는 맛이 없는 부위라고 믿었던 것 같다. 나는 유독 닭 요리에 먼저 손대지 않았다. 다른 식구가 원하는 조각을 집어 가도록 기다렸다.  


 아이 둘을 낳고 엄마 노릇을 하다 보니 나의 어린 시절이 겹쳐지면서, 선명하게 기억나기 시작했다. 부모의 식습관이 그대로 아이들에게도 대물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모가 좋아하는 메뉴가 자주 올라오고 아이들도 먹게 되니까 말이다. 번 한상에서 밥을 먹는 식구가 아닌가.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이 식구(食口)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런데 먹는 일이 아니어도 식구들 사이에는 공평하 않았다. 밥상머리에서 경험한 것들은 더 강하게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나누는 법은   가지였던 것 같다. 하나는 권위를 가진 어른부모님이  우선는 경우, 다른 하나는 성별에 의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종종 한쪽 부모의  편애로 분배가 되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형제가 우선되고, 무던하고 말이 없던 나는 늘 걱정거리에서 제외되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어려서 배우지 못한 것이 있었다.


 예전에 나누는 법을 배웠다면 좋았을 텐데.... 내 몫을 요구할 수 있었다면 말이다. 과거일이지만 가족이 똑 같이 음식을 나누고, 모두가 맛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감정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누구나 대접받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권위적인 질서나 잘못 해석된 전통은 불평등만 만들 뿐이었다. 가족 관계에도 음식이던 물건이던 각자의 몫을 인정해주는 건 중요했다. 단순히 가족 사이에서문제가 아니라,  집 밖에서도 주눅 든 채 내 몫을 당당히 요구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관습에 얽매여 살던 어린 시절이 끝났지만 몸에 밴 과거는 남아 있다. 자주 떠오르진 않아도 그런 기억을 버릴 수가 없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나누고 남겨두 배려가 지켜지는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식탁 위엔 어제 먹다만 치킨 박스가 있다. 가만히 보니 닭다리는 내가 남긴 것 하나뿐이다. 아껴두고 있지만, 아이들과 남편은 닭다리를 손대지 않을 것을 잘 안다. 참 감사한 일이다.

나는 그렇게 치킨 먹는 법을 새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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