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쌍 Sep 17. 2023

가을을 달래는 단호박의 마음

조바심 버리기

 가을을 기다렸다. 마트 진열대가 가을색으로 바뀌는 날을 기다렸다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추석 제수용품 때문인지 평소보다 상품이 수북하게 넘치듯 진열되어 있었다. 주부가 되고 보니 가을이면 장만해야 할 식재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제철 음식이기도 하고, 자연이 주는 수확물을 만나는 기쁨이기도 했다.


 햇마늘은 진작 나왔는데, 남은 마늘을 먹느라 사는 것을 미루고 있었다. 망에는 마늘대만 잘라 통째 넣어진 것도 있고, 뿌리와 마늘대를 제거해서 한알씩 쪼깨진 껍질 마늘도 있었다. 할인 행사 중인 깐 마늘보다 비싸기도 했지만, 간편한 쪽을 선택해볼까 싶어 슬그머니 돌아서는데 반가운 단호박이 보였다.



 쌓아 올린 호박들 사이에 유난히 하나가 눈에 띄었다. 크기도 컸지만 노란 부위가 넓고 오돌토돌 딱지가 많이 붙은 호박이었다.  포장박스에 나란히 놓인 미니 단호박은 반질반질 윤이 나고 진한 나뭇잎 색에 크기는 내 주먹만 한 했다. 왠지 비닐하우스에서 곱게 자란 듯 손색이 없었다. 장바구니에 들어 있는 호박과는 겉모습이 정반대였지만 바꾸고 싶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호박을 이미 골랐기 때문이다.


태양이 내리쬐는 밭에서 비도 맞고 바람도 쐬면서 자란 단호박이면 싶었다. 예쁜 과일을 고는 것처럼 호박을 고르지 않는다. 덩굴로 자라는 호박은 대롱대롱 달리긴 하지만 흙바닥에 닿은 채 자라거나 다른 호박이나 잎이 가려져 자라면 아무래도 겉이 매끄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울퉁 불퉁하게 딱지가 생기는 것도, 햇볕을 받지 못해 노랗게 변색되어 있는 것도 모두 자연에서 자라면서 생긴 건강한 흉터였다. 생긴 대로  단단하게 여물었다는 타고난 호박 원래의 모습 같.


 

여름 태양이 아직도 얼얼하게 남아서인지 새로 산 마늘을 알싸했다.


 호박은 꼭지는 바짝 마른 듯한데 무게가 묵직하니 숙성을 더 해야 할 듯싶었다. 숙성이 될수록 맛이 달고 진하게 되니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너무 익으면 썩기도 하지만 부분만 도려내면 먹는데 지장이 없으니 말이다. (사실 단호박은 썩을 때까지 두고 보고 있기도 쉽지 않다. ^^;)

 

 을, 단호박이 보일 때마다 하나씩 들고 와 부엌에 나란히 올려둔다. 수분이 날아가고 처음 사 올 때 보다 무게가 가벼워지고 겉이 짙은 초록이 되어가는 걸 보는 재미가 있었다. 장을 보러 갔다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 그냥 나오기 섭섭해서 장바구니가 가벼운 날 들고 오기도 했다.


그렇게 들고 온 호박은 집 안에서도 그냥 자리만 차지했다 며칠 몇 주가 지나고, 먼지가 쌓일 만큼 지나서 세월을 묵으면 하나씩 먹기 시작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그 해 가장 마지막에 먹는 단호박이 달고 맛있었다. 그 맛을 잊지 못해서 나는 가을이 오면 단호박을 사는 듯싶다.


그런데 올 해는 조급증이 생겼나 보다. 기다리던 여유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 온 지 며칠 만에 호박죽을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미 급한 마음 때문에 잘 익은 호박의 깊은 달콤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또 호박죽이 먹고 싶어 갔더니, 매대엔 달랑 하나 남은 호박뿐이었다. 호박을 잘라보니 색은 노란색에서 막 주황색으로 바뀌는 듯했다. 숙이 덜 되어서 아리고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기대했던 맛이 아닌 억지로 먹은 기분으로 호박 두 개를 먹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자꾸만 시간을 지체하고 충분하게 활용하지 못해서 답답했다. 무언가 망쳐놓은 것 같은 기분, 이미 늦어버려서 영영 못할 것 같은 기분, 중압감이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벌써 가을인데 변변치 않은 성과에 실망감도 들었다.

아직 덜 익은 호박처럼 가을은 완전하지 않았다.  


가을을 너무 빨리 데려오려고 했던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가을을 달래는 단호박의 마음을 새로 배워야 할 듯싶었다.  차례차례 꽃이 피듯이 가을도 완성되어 간다.


 호박을 사 오면, 이번에 좀 더 버텨봐야겠다.

알맞게 가 아니라 충분히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깊은 가을처럼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치킨 먹는 법을 새로 배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