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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Nov 09. 2023

작고 귀여운 귤

달고 쓴 귤맛

 귤박스가 도착했다.

멀리 바다 건너오느라 수고가 많았던 모양이다. 박스를 열자마자 후끈 열기가 느껴졌다. 남쪽은 아직 여름기운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 군말 없이 귤 선별작업을 하는 농부의 이마엔 촉촉한 땀으로 몸에서 나는 열기를 식혀줄 테니 말이다. 고맙게도 배 박스를 열어보니 상한 귤은 하나도 없었다. 아이가 작은 귤을 좋아해서 일부러 꼬마귤을 주문한다.


  귤을 반으로 뚝 쪼개서 먹어보니 달고 신선한 귤맛이었다. 귤나무가 일 년을 공들여 키워서 택배로 전해준 올해의 용량 귤이었다. 둘째가 보면 순식간에 껍질만 쌓일 테니 사진을 한 장 찍어 두었다. 정말 오랜만에 작고 귀여운 귤이었다.




 갑상선 호르몬제를 3년째 복용 중이던 어느 날이었다.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가 "엄마 동생이 필요해요."라고 했다.

난감했다.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아이는 할 말만 하고 미끄럼틀로 도망가버렸다.


 그 무렵 쥬쥬 인형을 좋아하던 아이의 친구는 매일 같이 스티커를 아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인형은 앞머리를 내린 긴 생머리를 하고 미소를 짓는 얼굴로 여러 가지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분홍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 알고 있던 인처럼 큰 쥬쥬가 아닌 아이처럼 귀엽고 작은 쥬쥬인형이었다. 아이는 친구가 스티커를 고르라고 할 때마다 작은 쥬쥬인형을 받아왔던 모양이다.


 얻어온 스티커 인형들을 이어 붙여서 마치 손을 잡은 듯 나란히 종이에 붙이고는 혼자서 이야기를 만들며 놀았다.

그러다가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얼마 뒤에 병원진료가 예약되어 있었다. 조금 용기가 필요했다. 아니 큰 결심이 서야 했다. 결혼을 하면서 아이는 둘을 낳아야지 하면서 웃고 넘겼을 땐 별일이 아닌 줄 알았다.

결혼은 하면 아이는 저절로 생기고 남매든 형제든 둘은 낳을 수 있겠지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은 참 말도 하기 쉬웠다.  몸은 첫 아이의 육아도 문제였지만 직장을 그만둘 지경인 몸을 회복해야 했다. 1년의 휴가에도 결국 퇴사를 했다. 3년 동안의 시간은 수치와의 싸움이었다. 호르몬제를 조금 줄였다가 다시 늘리고, 번갈아 다른 용량을 먹고 이틀에 한번 약을 먹었다가, 처음 용량의  절을 먹고 있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를 잡아보고 싶었다. 곧 마흔이 눈앞이었다. 그런데 쥬쥬인형처럼 앙증맞고 귀여운 아이가 찾아와 줄 것만 같았다. 니 그 인형을 갖고 놀 아이의 모습이 어른 거렸다.


"저기 선생님, 둘째 가져도 될까요?"

"그럼요. 낳으시면 되죠."

"정말 임신해도 되나요?"

"네 당연하죠. 뭐 매달 갑상선 수치를 봐야 해서 피검사를 받아야 하지만 그 정도는 일도 아니잖아요. 엄마가 되는 일이 얼마나 기쁜 일인데요."

 

의사 선생님은 남자분이셨다.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로 말을 해주시는데 그냥 나도 웃기만 했다.

다음 진료가 예약된 6개월 뒤, 나는 홀몸이 아니었다. 천사가 찾아왔고, 첫째와 똑같이 입덧은 초기부터 날 괴롭혔다.


오직 신맛이 나는 것만 입에 들어왔다. 귤이든 오렌지든 시큼한 맛은 노산이던 내게 비타민 그 이상이었다. 만삭까지 귤을 구해서 먹었는데, 태어난 아이는 귤맛을 알고 있는지 노지감귤이 출하되기 시작하면 귤타령이다. 귤이 기다리는 둘째가 학교에서 오자마자 소쿠리에 귤을 차곡차곡 쌓아서  담더니 거실로 갔다.

무릎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는 tv리모컨을 들었다. 


"엄마 귤은 이불을 덮고 먹어야 제 맛이야. 엄마 귤껍질은 어디 모아 둬?"

 

 기다리지 못하고 귤껍질을 벗기고 입에 넣은 아이는 엄지손가락을 내게 보이며 눈이 동그래졌다. 맛있게 먹는 아이는 즐거운 표정인데 나는 아까 먹은 귤 하나가 목에 걸린 기분이었다.




대용량 박스에 담긴 작고 귀여운 귤 때문인가? 속이 울렁거리더니 한동안 잊어버렸던 추억이 소환되었다. 엄마가 잠시 추억에 젖은 사이 아이는 아직 먹어야 할 귤이 열다섯 개나 된다고 웃는다. 그 이상은 먹으면 손이 노랗게 변할 거 같다면서 말이다. 아이는 가족들이 귤을 몇 개나 먹는지 감시하면서 맛있는 귤이 줄어가는 것을 아쉬워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언제든 귤을 구하기 쉬운 계절이니 말이다.  


귤 덕분일까. 둘째 덕분일까. 귤맛이 오늘따라 시지도 않고 콤한데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섞여서 목에 걸린 듯 넘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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