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가 내손에 온 타이밍

모과차 만들기

by 무쌍

을 뜬 아침 밖은 어둡고 흐릿했다. 뿌옇게 내려앉은 안개는 벌써 흰 눈이 쌓인 건가 착각하게 했다. 금방 사라질 것 같지 않는 안개는 알아내지 못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 내 시선을 끌었다. 소 보이던 북한산 자락은 하얀 무명천 같이 변한 하늘이 가려버렸고, 아침 산책을 하는 동안 눈앞은 침침한 듯 보이는 모든 것이 흐릿했다.


이상했다. 날씨는 우중충한 안개로 어둡지만 몸은 티끌 없이 맑음이었다. 일정표에 별일도 없고, 특별하게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오늘은 뭘 해도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이 든 건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의 아침 등굣길이 평화로웠기 때문이었다. 유독 아침잠이 많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가 있다. 아이들은 비슷비슷한 논쟁을 하면서 등교 준비를 미루며 허송세월을 보낸다.

엄마인 나는 수시로 몇 분인지 알려주며 재촉한다. 을 나서는 시간에 따라 학교로 뛰어 갈지 걸어서 갈지가 정해졌다. 거의 매일 현관문을 나서면서 학교 앞까지 쌩쌩 바람처럼 반은 뛰고 반은 숨을 고르며 달려갔다.

그런데 오늘은 모든 것이 수월했다. 아이는 평소보다 온순하게 등교 준비를 마쳤고 엘리베이터는 기다렸다는 듯 열렸다. 등굣길에 만난 단짝 친구 덕에 나는 교문 앞이 아닌 집 근처에서 아이와 손인사를 했다. 두 아이의 수다는 느린 걸음만큼 여유로워 보였고, 뒤돌아 보니 큰 아이도 집을 나섰다.


어제는 빠뜨린 물통을 가지러 가던 길을 돌아왔고, 늦잠을 잔 아이는 짜증이 났는지 까칠했다. 오늘 아침은 모든 일과가 완벽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일 년에 몇 안 되는 손꼽을 만큼 귀한 날이기도 했다. 숨 가쁘게 쫓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베란다 창으로 길게 누운 가을 태양이 들어왔다. 뿌옇게 흐리게 한 안개는 어느새 밝은 태양이 밀어낸 듯 창밖이 선명해졌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의식'이 지루해졌다.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고 밖을 나설 채비를 했다.


집 앞에 느티나무가 떨어뜨린 낙엽이라도 보고 오고 싶었다. 휴식은 달콤했지만 아무래도 어색했나 보다. 눈을 뜨면 집 밖으로만 나가고 싶은 내 성미는 어쩔 수 없었다. 쓰레기를 수거함에 넣고 돌아서는데 경비원 아저씨가 보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저기 모과 좀 갖고 가실래요?"

고개를 돌려보니 모과가 박스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동안 집 앞에 열린 모과들이 어디로 가나 싶었는데, 아저씨들이 모여서 해마다 모과를 따는 모양이었다. 모과나무는 3층 높이만큼 키가 큰데 장대를 겨우 밀어내며 열매를 따고 계셨다. 모과 수확은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상자엔 쪼개진 것도 있고, 따다가 난 상처가 있는 모과도 있었지만 그중에 커 보이는 걸로 두 개 골랐다. 앞서간 아저씨 양손에 가득 들린 모과를 보며 욕심이 났지만, 손이 작은 나는 큰 모과 두 개가 만족스러웠다.

모과가 잘 익어서 향기가 진동했다

일이 없어 허전했던 빈손에 묵직한 모과는 반가운 손님이었다. 베이킹 소다로 모과 열매를 문지르고 깨끗하게 씻어냈다. 물기를 닦으며 냄새를 맡아보니 파는 것과는 다른 진한 향이 났다. 막 수확해서 인지 아침에 안개를 맞아서 인지 겉껍질엔 퍽퍽함은 없고 수분감이 느껴졌다. 껍질은 잘 익은 망고처럼 진했고, 반으로 쪼개 보니 과육도 껍질과 구분되지 않을 만큼 노랗게 익어 있었다.


빈병을 열탕 소독하고 모과 채 썰 준비를 했다. 모과는 단단해서 늙은 호박 다듬기 만큼 손에 힘이 든다. 그래도 껍질이 깨끗해서 따로 벗겨낼 필요가 없었다. 칼이 사각거리며 모과를 자르는 소리가 듣기 좋았고, 모과향이 진동하니 비염 때문에 막힌 듯 얼얼했던 코가 숨쉬기 편했다. 모과 향기가 은은하게 스며들며 집안을 산뜻하게 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칼질을 하다 보니 오래 걸렸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손목이 얼얼하게 칼질을 하다 보니 손질된 모과가 수북해졌다. 평소엔 음식을 하다 말고 재료가 없어 마트로 가는 일이 허다한데, 얼마 전에 새로 산 설탕 봉지가 있었고, 생강청과 꿀도 남아있었다. 설탕을 넣어 바락바락 버무린 모과는 달콤한 향을 내며 금방 설탕물이 생겼다.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특별한 손맛이 없는 나는 음식을 할 때마다 마음으로 하는 주문인데 중얼거리면 꼭 들어주는 듯했다.


모과는 두개의 유리병에 쏙 들어갔다(2022.11.16)

두 개의 모과는 두 개의 유리병에 쏙 들어갔다. 워지기 전에 모과차를 만들었으니 타이밍이 딱이었다

모과차 만들기를 미리 계획했다면 해야 할 일처럼 언제 끝을 낼까 부담스러웠을 텐데, 갑자기 생긴 모과 덕분에 여유롭게 차를 만들었다. 게다가 필요한 재료들이 약속한 듯 보조를 맞춰 주니 참 고마운 일이었다.


추운 겨울이 온다. 꽃도 없고 나무도 쓸쓸한 계절이다. 아무래도 겨울은 그리운 것이 더 떠올라 견디기 쉽지 않다. 자연이 그리워 울적해질 때면 모과차를 마셔야겠다. 모과 향기가 봄에 핀 연분홍 모과꽃을 떠오르게 하고, 여름 초록으로 커가는 모과 열매를 생각나게 할 것이다. 다시 봄이 오면 모과차가 그리워질 듯하다.


부지런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연말이 다 되어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아 섭섭했다. 모든 날이 오늘처럼 완벽한 순간들로 연결되며 순조롭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보 모든 일에 완벽한 타이밍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몇 년을 살았지만 집 앞 모과 수확은 처음 마주쳤으니 말이다. 조금 늦게 갔다면, 조금 이르게 나갔어도 모과를 손에 넣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내가 좋아하는 모과였기 때문에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어떤 기회도 그 삼박자가 맞아야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내가 하고 싶은 가'를 스스로 묻고 마음먹는 일이 가장 어려운 듯하다. 한 해 동안 뭘 했는지 분석하는 일보다는 내가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봐야겠다.

곰팡이가 피지 않게 모과차를 섞어주려고 병뚜껑을 열었더니 달콤한 향기가 듬뿍 느껴다. 모두가 모과가 내 손에 들어온 완벽한 타이밍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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