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에 아보카도 두 개가 익어 간다. 얼마 전부터 아보카도를 먹어 보고 싶다고 아이가 졸라댔다.
"아보카도 먹고 싶어! 엄마는 먹어봤어? 맛있어?"
"음... 먹어봤지. 그런데 아무 맛 안나. 별맛이 나지 않거든... 부드러운 맛이지."
아보카도를 좋아한다는 세프가 안에든 동그란 씨앗을 빼는 손질법이 무척 인상적이었나 보다. 종종 아보카도를 캐릭터로 한 그림이 귀엽다며 실제로 보고 싶어 했다.
아보카도에 누가 '숲의 버터'라는 애칭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그 맛을 그대로 표현한 듯싶다. 맛깔난 음식재료로 쓰임이 많은 아보카도는 주로 수입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싼 가격은 아니다. 요즘은 흔하게 볼 수 있고 가격도 꽤 내렸지만, 내게 필요 없는 품목처럼 여겨지는 것 중에 하나였다. 내가 먹지 않았으니 아이들에게 먹여볼 기회도 없었던 같았다.
아보카도를 사려고 보니, 마트 매대에 3가지 팻말이 꽂혀있었다. 바로 드실 분, 2-3일 후에 드실 분. 4-5일 후에 드실 분이라고 쓰여있었다. 후숙으로 먹는 재료라서 이런 이색적인 팻말도 걸어두고 판매를 하는 듯싶었다. 나는 일부러 덜 익어 보이는 가장 단단하고 겉이 초록색인 것으로 골랐다. 식탁 위에 올려두고 아보카도가 익어가는 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천천히 음미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오래전 내게도 있었던 고독의 시간을 말이다.
처음 고향을 떠난 나는 비행기를 타고 15시간을 날아갔다. 최대한 집에서 멀리 떠나고 싶은 욕구를 오래 참아왔던 내게 기회가 다시 올 것 같지 않았고, 놓칠 수 없었다.
타국에서 정해진 돈으로 생활을 하기엔 모든 것이 빠듯했다. 셰어 하우스에 살면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데, 자연스럽게 그 나라에서 저렴한 식재료를 먹게 되었다. 처음 먹는 것들이 어색했지만 금방 그 맛에 적응했다. 특히 아보카도는 신기했다. 입안에서 꾸덕하는 듯하더니 미끄러지며 녹아 사라졌다. 기름진 풍미는 빈속을 부드럽게 채우고 든든하게 해 주었다. 음식을 만들기 싫은 날은 푸드 코트 세일 시간에 맞춰 갔다. 쌀로 만든 롤 초밥집에서도 가장 싼 가격에 파는 건 아보카도 롤이었다. 배부르게 먹고 싶은 날엔 2줄을 샀는데, 김밥 반장으로 싼 롤은 한국식 김밥 한 줄보다는 적은 양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지갑이 헐렁하던 시절에 먹던 아보카도는 그때의 내가 떠올라서 인지 다신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는 먹고 싶지 않았던 아보카도를 사 왔다. 사 온 이유가 아이들의 호기심 때문이라니 엄마가 되고 나선 못하는 것이 없어졌나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기 싫은 일도 하게 되었다.
짙은 초록색 오돌토돌한 껍질이 하루하루 갈색으로 바뀌는 걸 보니 그동안 왜 이걸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었다. 별일 아닌 것에 고집을 피운 것일까? 가끔은 내키는 대로 하던 시절이 그립다. 하기 싫어도 해보고, 먹기 싫어도 먹어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얼마 전 일이다. 잔잔했던 일상에 손님이 찾아왔다.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하던 참이었다. 뜻밖에 손님처럼 날아 들어온 제안이었다.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가 뭔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했다. 또 한참을 고민하고도 흔쾌히 수락하지 못한 나를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리고얼마 뒤 다른 손님이 왔다. 환절기에 찾아온 두 아이의 감기는 나를 꼼짝하지 못하게 했고, 일상은 그냥 흘러갔다.
그 사이 아보카도는 완전히 익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니 예전보다 더 맛이 좋았다. 아이들과 남편은 맛을 보더니 똑같은 말을 했다.
"맛있게 먹어."
오래전처럼혼자서 아보카도를 매일 먹게 되었다. 하지만 무얼 해야 하지 모르던 그때처럼 쓸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내가 글쓰기를 시작해서 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더 잘 쓰고 싶어졌다. 시간은 걸리지만 농익은 아보카도처럼 천천히 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