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겨울을 보내고 맨땅에 솟아나듯 피어나는 봄꽃은 싱그럽고 풋풋하다. 눈만 녹아도 초록 이파리가 돋아나며 봄꽃은 빠른 속도로 찾아온다.
그에 비하면 가을꽃은 기다리다 지칠 듯해야 만날 수 있다. 덥수룩한 초록 풀숲이 여름 더위에 녹아내려 곤죽이 되거나, 더운 공기가 바짝 말리고 부서뜨린 더미들을 비집고 피는 것 가을꽃이다. 그중에서도 투구꽃은 유독 시선을 끈다. 무서운 독초이기도 하지만, 투구 모양을 한 꽃의 자태는 한번 보면 잊을 수가 없다. 9월이면 피는데 11월 중순이 지나도 찾지 못했다. 기억을 더듬어 지난가을에 봤던 화단을 찾아갔지만 한 포기도 보이지 않았다. 가을꽃은 모두 피었지만 보고 싶은 투구꽃은 없었다.
유난히 올해는 계절을 알리는 자연이 혼돈에 잠긴 듯했다. 11월이지만 철쭉이 어쩌다 한송이가 아니라 나무마다 보였고, 명자나무에 꽃들도 봄처럼 풍성하게 꽃을 피웠다. 금방 사라질 듯했던 토끼풀들도 희고 둥근 꽃을 피우며 봄날 풍경을 떠오르게 했다. 개나리꽃은 한송이 지면 또 새꽃이 피어 개나리 담장에 노란 점들이 멈추지 않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계절 꽃이 제때 피지 않는다 뉴스는 없었지만, 때 아닌 봄꽃이 만발한 이유를 보도하는 기사가 있었다.
명자나무꽃 (2022.11.27)
전문가들은 북극 주변 소용돌이가 강한 상태로 이어지다 보니 찬 공기가 북극에 갇혀 남하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동서로 이어진 북극 제트기류가 북극의 냉기를 단단히 막고 있으니 우리나라까지 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20도가 넘는 포근한 날씨가 꽃나무들을 혼동하게 만들고 있나 보다. 북극의 소용돌이는 갇힌 채 있다가도 북극 제트기류가 뚫리기도 하는데, 지난겨울 그 냉기가 빠져나와 영하 50도의 혹한을 만들기도 했다.
만발한 철쭉과 개나리가 때도 아닌데 피었다고 할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꽃이 보내는 위험 신호를 감지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초봄처럼 온난한 태양과 추운 공기가 섞인 틈에 피는 것이 아니라, 절기에 맞지 않게 춥지 않은 날씨 때문이었다. 계절에 맞지 않은 꽃은 지구온난화의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철쭉꽃(2022.11.27)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투구꽃 한 포기를 만났다. 꽃대가 딱 한줄기 뻗어 나와 초라해 보였지만 무척 반가웠다. 같은 날 운 좋게 투구꽃이 뭉쳐서 자라는 화단을 찾았다. 꽃송이가 제법 많아서 꽃다발처럼 필 시간을 기다렸다. 포근한 날씨에 꽃들이 만발했지만 유독 투구꽃은 쉽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가을이 떠나는 아쉬움을 달래며 오래도록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갑자기 한파가 들이닥치지만 않으면 말이다.
하지만 모든 예상은 빗나갔다. 다음날 파란색 투구꽃을 또 보러 갔지만 없었다. 누군가 고의로 꺾어갔는지 뜯긴 자국만 남고 꽃가지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옆 화단엔 철쭉 꽃송이가 봄처럼 싱그럽지만 정작 계절에 피는 투구꽃은 사라졌다.
투구꽃 (2022.11.17)
온난화로 포근해진 날씨가 영향을 준 듯 늦게 핀 꽃이 맘에 걸렸는데, 꽃도둑이 뚝뚝 꺾어가 버렸다. 투구꽃과 나의 만남은 너무도 짧았다. 이런 이별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화가 치밀었다. 그냥 두어도 꽃은 시들게 되는데 말이다.
학문적인 관찰자는 아니지만 매년 보던 길가의 꽃들이 달라 보이는 건 분명했다. 지구가 아프니 식물들도 흔들리고 있나 보다.감정이 흔들릴 때마다 나를 위로해주는 건 초록 자연이었는데, 마냥 받기만 했나 보다.
초록 식물들에게 미안해졌다. 우리 모두가 잘 지낼 방법은 없을까? 쓰레기를 덜 버리고 소비를 줄인다면,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