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단풍은 아직 초록잎 그대로였다. 집 근처 공원에 아침 산책을 나선 우리 부부는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아침 태양이 내리쬐며 뿌옇게 먼지들이 눈에 띄었다. 도시에서 만들어진 미세먼지들이 공원의 나무들 틈에서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듯 보였다.그래서인지, 작은 숲처럼 싱그러운 초록 나무를 볼 수 있는 공원 벤치는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벤치가 놓여 있는 공간은 빽빽하게 청단풍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키가 크고 늘씬하게 뻗은 나무들 사이로 공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공원 한가운데 여자가 발끝을 세우고도 나뭇가지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긴 집게를 들고 있는 여자가 가지를 잡고 끌어내리자 다른 여자는 점프하듯 가지를 잡아당겼다. 키가 큰 감나무였다. 덥수룩하게 나뭇잎이 붙은 가지엔 주홍색이 절반은 물든 대봉감이 달려 있었다. 가지 끝에 달린 것이 아니라 줄기에 붙어서 인지 쉽게 따지 못하고 낑낑대고 있었다.
"감을 따려면 사다리를 갖고 오지, 왜 저러고 딸까?"
처음엔 구청에서 나온 줄 알았다. 두 여자의 상의 점퍼가 꼭 유니폼 같았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는 감을 수확하려고 직원들이 일부러 나온 건가 싶었다. 이른 아침 공원에서 그들의 행동은 더 눈에 띄었다. 지나가던 남자가 두 여자를 도와준다고 가지를 잡아주었다. 그런데 저 멀리 성큼성큼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모습이 익숙했다. 화단에 장미 나무를 가지치기도 하고 떨어진 낙엽도 치우며 청소를 하거나 꺾인 나뭇가지를 정리하며 공원을 왔다 갔다 하는 분이었다.공원을 관리하는 직원이 분명했다.
'그럼 감을 따는 저 사람들은 뭐지?' 뭔가 이상했다.
"이 공원에서 열매 따면 벌금이 오만 원입니다."
그들은 직원들도 아니었고, 감서리 하러 온 모양이었다. 두 여자는 고개를 세우고 아무렇지 않았다. 한 여자는 관리인 옆에 바짝 붙어 서서 능청스럽게 웃었다. 이미 딴 감은 어떻게 하냐며 버리냐고 물었다. 두 여자가 서리한 감은 제법 많아 보였다. 준비해온 검정 봉투가 모두 4개였는데, 봉투에 감을 다 채운 듯했다.
관리인은 큰 목소리로 "벌금이 오만 원이라고요."라고 했지만, 사진을 찍거나 딴 감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훈방조치를 하고 보낼 듯싶었다.잠시 후 다시는 하지 말라고 하더니 되돌아갔다. 보고 있는 나는 민망한데, 감서리를 한 두 여자는 별일 없는 듯했다. 묵직해진 검정봉투를 나눠 들고 유유히 공원을 빠져나갔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감나무를 보며 누구든 하나 맛보고 싶을 수 있다. 잘 익은 달콤한 감 맛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감나무 앞을 지나면서 보니 관리가 잘돼서 인지 깍지벌레도 없고 깨끗한 열매를 달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 줄줄이 서 있는 감나무들도 비슷하게 열매는 달렸지만 얼핏 봐도 먹을 만한 상태가 아닌데 말이다. 아파트 단지 화단에서 잘 익은 감 하나와 덜 익은 감이 뚝 떨어진 걸 보고 가을이 왔구나 싶었는데 공원에선 감서리 장면을 목격하다니 '감'이 재철이긴 한가보다.
그 공원 한쪽엔 흔들의자가 놓여 있는 꽃밭이 있다. 며칠 전에 장보고 돌아가는 길에 자리가 비었길래 반가운 마음에 앉았다. 가을 화단은 어느새 다른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런데 의자에 꽃나무 사진과 함께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누군가 꽃나무를 파간 모양이다. 제자리에 다시 갖다 놓지 않으면 CCTV에 찍힌 사진을 공개하겠다는 경고였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데 얼굴을 익히는 건 쉽지 않다. 한동네 살아도 코로나 전에 알던 사이가 아닌 이상 매일 같은 산책로를 걸어도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다. 오죽하면 마스크를 벗으면 상상과 다른 얼굴이란 말이 나오겠는가.
감 서리를 몇 개 했다고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을 수 있지만, 훔쳐가는 걸 숨기려고 검정봉투를 준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감춰야 하니까 말이다. 며칠 사이 공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니 작은 해프닝만은 아닌 듯싶었다.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인정하는 모습을 보기 어려워진 세상이다. 어쩌면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더 쉽게 비난하는 모습에서 무자비함을 느낀다. 집 근처에 큰 공원이 있어서 살기 좋다 느껴졌는데, 범죄의 공간이 되어 버린 듯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 공원은 대부분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찾는 공간이다. 종종 간병을 받는 몸이 불편한 어르신이나 막 걸음마를 하는 아가들을 데리고 오는 엄마들을 볼 때면, 그 작은 공원이 대단히 중요하고 꼭 필요한 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답답한 집안에서 잠시나마 벗어나자연이 보내는 계절의 신호를 찾는 기분은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유모차를 밀고 공원을 찾던 예전에 나도 그렇게 봄부터 가을까지 꽃구경을 했고 예쁜 낙엽을 찾기도 했다. 자연은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고 표현한 소로우의 말이 딱 맞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공원에서 감을 따고 나무를 파서 가져간 사람들이 다른 곳에선 무엇을 거리낌 없이 할까? 탐이 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갖고 가버리면 공원엔 무엇이 남을지 모르겠다. 공원 입구에는 시설 안내도와 큼지막하게 공원 내 금지 안내가 되어있다. 그리고 화단 옆 팻말엔 이런 문구가 있다.
집으로, 회사로 가는 길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정원으로...(중략) 잠시 계절마다 다르게 피어나는 꽃들과 식물들로 힐링하면서 주민 여러분 마음의 정원도 풍성해지길 기원합니다.
화단엔 새로운 꽃들이 심어졌다(용담꽃, 소국화,펜타스)
큰 감나무엔 아직 토실토실한 감들이 많이 열려있다. 부디 감나무가 가을이 깊어졌음을 모두가 함께 하는 시간이 오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