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로를 한 시간 넘게 걸었다. 진료 시간에 맞춰 병원으로 돌아가려는데 '30분 지연' 안내 문자가 왔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강바람을 실컷 맞았는데, 또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식물들은 말이 없었다. 다행히 양지바른 둔치엔 초록잎들이 눈에 띄었다. 들판에 돋아난 야생초들을 샅샅이 뒤져서 꽃봉오리라도 찾아보고 싶었다.
봄은 야생초들도 겨우 고개를 내놓은 정도였다. 달맞이꽃 로제트가 붉은 꽃잎처럼 땅에 붙어 있고, 봄까치꽃은 작은 잎 몇 개가 다였다.
그 자리에서 가만히 내리쬐는 태양이 주는 대로 따뜻한 온기를 받았다. 내 그림자 안에 들어온 야생초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리는데, 꽃다발 같이 탐스러운 꽃 하나가 보였다.
흰색 냉이꽃이었다. 아직 봄 냉이도 맛보지 않았는데, 꽃은 벌써 피었다. 봄꽃이 순서대로 피면 바쁘게 지낼 생각에 잠시 들떴지만, 시간은 멈춘 듯 가질 않았다. 일 년에 한 번 채혈검사 후 결과를 기다리는 2시간은 시간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무중력상태가 그런 것 일가? 내가 어디에도 몸이 닿지 않고 떠 있는 기분이 든다. 몽롱하게 어떤 것도 집중할 수 없으니 두 발을 움직이는 산책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매번 어쩔 수가 없다. 혹시라도 약을 끊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십 년도 넘게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약은 끊을 순 없을 것 같아요. 일 년 뒤에 볼게요."
"네."
담당의사와 나는 또 같은 약속을 했다.
냉이꽃을 보니 냉잇국이 먹고 싶었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뿌리가 길고, 연한 것을 골라 냉이를 샀다. 깻잎이나 미나리처럼 냉이는 선명한 맛과 고유의 향이 있다. 다시마 육수에 된장을 넣어 끊인 냉잇국은 아이들도 거부하지 않는다. 작년에 날이 다 풀리고 산 냉이는 질겨서 뿌리를 하나도 먹지 못했다. 냉이는 잎이 조금만 길어져도 질겨지니 찬바람이 남아 있는 요즘 냉잇국을 먹기 딱 좋은 듯했다. 잎이 짧고 뿌리가 손가락 길이만 한 냉이가 먹음직스러웠다. 냉이를 물에 담가두었다 씻는데 뿌리의 단단함이 제법 느껴졌다. 끊는 육수에 냉이를 넣었더니 초록색이 선명해지면서 반가운 향내가 맡아졌다.
금방 끊인 냉잇국은 냉이가 보들보들 부드럽게 넘어갔다. 긴장되었던 몸이 모두 풀린 듯 고마운 맛이었다. 국은 한 끼 먹으니 사라졌다. 냉이를 좀 더 사들고 올걸 이럴 땐 손이 작은 내가 참 아쉽다.
그래도 일 년 동안 먹을 약이 생겼다. 작은 단추만 한 약은 나에게 딱 맞아서 매일 삼킬 때마다 '고마워'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365개의 라벤다색을 알약을 보니 곧 피어날 라일락꽃이 더 보고 싶어졌다. 일 년을 기다린 꽃이니 더 반가울 듯싶다. 봄은 순서를 잘 알고 있으니 곧 차례대로 피어날 것이다.
비었던 자리를 채운 약병도, 냉이꽃이 선사해 준 봄도, 따뜻한 냉잇국 먹은 몸도 모두 제자리를 찾은 듯하다. 이번 봄은 냉이꽃보다 냉잇국이 좀 더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