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잠이 없는 나는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새벽에 글을 읽는 일이 참 좋다. 바깥공기가 맡고 싶어 베란다 창을 열었더니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은 다 떠났다. 그래도 옆에 서있는 느티나무가 연두색 새 옷을 입기 시작해서 시원한 바람을 넣어 줄 테니 아쉽지는 않았다.
다시 모니터를 보려는데 파란색꽃잎과 눈이 마주쳤다.
첫 나팔꽃이었다. 어제 물을 줄 때까지만 해도 꽃봉오리가 밖으로 올라오지 않았는데 새벽에 피었나 보다.
생각지도 않은 꽃송이가 찾아왔으니 좋은 일이 생기려나...
꽃 한 송이가 뭐라고 별 것 아닌 것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침밥을 먹는 식구들에게 자랑하듯 꽃 사진을 보여주었다.
가족 모두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보더니 시큰둥했다. 사실 싹이 돋은 것이나 꽃이 핀 것이나 내겐 중요하지만 아이들과 남편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래도 자랑할 곳은 가족들 뿐이니 그런 반응도 모른 척 넘어가야 한다.
2023.04.04
한송이 나팔꽃은 파란 화분에서 지난겨울 싹이 돋았다. 겨울 내내 거실에서 다른 화초들과 보낸 작은 모종은 봄이 되고 베란다로 옮겼지만 이파리가 6장 남짓 더 길어지지도 뻗어나가지도 않았다. 자연의 시계에 맞게 태어났다면 늦여름에 피기 시작해야 할 나팔꽃이었다.
집에서 돌보는 화분인데도 일부러 심지 않았는데 씨앗이 발아될 때가 있다.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부겐베리아 화분에 토마토 싹이 올라오거나, 고무나무에서 종지나물이 나기도 한다. 나팔꽃 씨앗은 지난해 심었던 나팔꽃 열매를 정리하면서 들어간 듯했다.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면서 이리저리 옮겨다니기도 하나보다.
베란다에 텃밭상자도 실패가 대부분인데, 올해는 부추싹이 두 개 돋아났다. 언제 심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유추가 불가능하지만 벌써 잘라먹었다.
2년 전에 심었던 봉선화가 하나도 돋아 나지 않아 실망했는데, 이듬해에 싹이 돋아 난 적도 있다. 발아가 안된 씨앗도 흙 안에 숨었다가 나올 기분이 들면 세상으로 나오는 걸까?
여러 가지 추리를 해보는 일이 흥미롭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이는 보상을 줄 때가 더 신이 난다.
꽃 한 송이가 하루를 기분 좋게 해주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불편한 택배 문자가 왔다. 혹시 기분이 상해서 우울할까 봐 꽃은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나 보다. 시든 나팔꽃이 돌돌 꽃잎을 말았던 오후, 기다리지 않은 택배가 도착했다.
상자 안엔 아무도 먹지 않은 귤이 얼마나 버틴 건지 금방 숨이 넘어갈 듯했다. 오는 동안 썩은 귤이 만든 곰팡이 냄새가 불쾌한 감정이 더 나를 찌푸리게 했다.
2023.04.04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다.
택배가 와서 방해하는 바람에 글쓰기는 신통치 않았지만 나팔꽃의 하루가 저물어 간다. 꽃은 완전히 감아올린 머리를 하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딱 하루만 피는 나팔꽃에게 하필 오늘 찾아왔는지 묻고 싶지만 딱 한마디만 했다. '고마워!'
허름한 옷을 걸친 듯 오래 묵은 감정을 다시 꺼내야 했다. 흐릿한 오늘 날씨처럼 나의 감정도 잠깐동안 흐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