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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게 나를 묻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라일락
라일락 향기
by
무쌍
Apr 3. 2023
산들바람처럼 라일락향기가 맡아졌다.
그런데 예전 같지 않은 건 여름 날씨처럼 해가 뜨겁다는 것이었다. 건조한 바람 때문인지 포도송이처럼 달린 꽃송이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나는 라일락도 수수꽃다리는 이름도 좋아서 둘을 번갈아 쓴다. 우리말로 수수꽃다리라고 하지만 개량된 품종이 많아서 라일락이라고 해야 표기할 때 실수를 하지 않았다.
좋아하지만 꽃이건 나무건 식물에 대해선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시간을 걸리지만 경험으로 하나씩 깨닫거나 책으로 배운다. 보는 대로 관찰하는 것이 더 좋은지도 모르겠다.
아침 산책길에 라일락 나무를 열 그루는 넘게 만난 듯싶다. 그 작년엔 어깨에 닿을 듯이 늘어졌던 가지도 사라지고 꽃송이는 몇 개인지 한눈에 셀 수 있을 만큼 적었다.
향기를 맡느라 코를 내밀었는데 뜨끈한 온도와 공기가 느껴졌다.
보
글보글 꽃송이가 올라오며 주변을 향기로 채우는 듯했다. 냄새만 맡아도 비누 세안을 한 듯 청결하고 뽀득하게 깨끗한 공기가 스며들
었
다.
2023.04.03 (라일락)
주말 중 하루는 아침을 먹고 나면 나는 자유인이 된다. 남편이 점심을 만들기 때문이다. 메뉴는 항상 똑같다.
계량컵을 꺼내 물을 따르고, 집게로 여러 차례 냄비 안에 면발을 집어 들었다 놓으면서 꼬들한 봉지 라면을 끓인다.
내가 보기엔 남편의 라면은 늘 덜 익힌 면발이지만, 아빠가 끊인 라면을 아이들은 좋아한다. 작업이 밀린 남편 대신 라면을 끓여준 적 있었다.
"엄마! 아빠라면이랑 맛은 똑같은데, 뭔가 다른데."
"난 좋은데."
결국 막내는 앞으로 아빠가 끊인 걸 먹겠다고 선언했다.
막내는 꼬들하게 익은 라면을 좋아하고, 큰 아이는 나랑 똑같아서 잘 익은 라면을 좋아한다. 남편은 후다닥 라면을 먹지만 나와 큰 아이는 느긋하게 밥 뜸을 들이듯 여유를 부린다.
라일락꽃을 한참 보고 들어왔더니, 기다렸다는 듯 남편이 라면을 끓인다. 남편이 나랑 큰아이를 위해서 먼저 잘 익은 라면을 끓였다. 그리고 막내와 남편의 라면이 완성되었다. 참 이상하다. 라면은 똑같이 계량된 스프와 면이 만드는 맛인데도 왜 다르게 느껴질까?
남편이 잘 익혔다고 했지만 나는 또 뜸을 들였다. 여전히 덜 익은 듯 한 면이
보
였다. 잠시 라면을 앞에 두고 여유를 부렸더니 늘 먹던 그 맛이 되었다.
산책로에서 만난 라일락은 색도 모양도 조금씩 달랐지만, 라일락이 가진 향내는 비슷했다.
조향사라면 이럴 때 뭐라고 설명을 할까? 꽃향기는 다 좋아하는 내가 공정한 판정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꽃 덕후의 개인적인 견해로 뭔가 다른 점을 찾았다.
만개한 라일락과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라일락은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활짝 핀 라일락은 보글보글 잘 익은 라면처럼 뜨끈하고 뭉근한 향기가 났다.
그리고 금방 뚜껑을 연 듯 반쯤 핀 라일락은 신선하고 싱그러운 꽃향기가 단번에 맡아졌다. 농축된 향을 스포이드로 떨어뜨린 듯 코 안에서 오래 남았다.
여름 태양이 찾아온 듯 무척 더운 날이었다.
내일부터 비 예보가 있던데, 아직 피지 않은 라일락이 보글보글 끓어올라 잘 익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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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무쌍한 감정번역가/ 사연은 버리고 감정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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