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착한 텃밭

날마다 배추 구경을 간다

좋은 생각

by 무쌍

혼자 하는 산책엔 코스가 따로 있지 않다.

꽃이 피어 있는 곳을 발견하면 목적지가 정해진다. 요즘은 1층 화단에 피는 나팔꽃 덩굴과 개미취를 보고 나면, 곧장 집 뒤편에 있는 유치원 앞마당으로 향한다.


배추를 보기 위해서다. 물론 내가 심은 배추도 아니고,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가꾸는 텃밭에 자라는 배추다. 지난가을도 지지난 가을도 올해도 어김없이 배추구경을 간다. 봄에는 작물이 바뀌지만 가을밭엔 늘 배추가 자란다.


나팔꽃 덩굴과 개미취(2023.09.24)


한 달 전에 배추를 심은 날짜를 세운 팻말을 처음 보았다. 8월 말이면 배추모종을 심기 딱 좋은 시기다. 늘 비슷한 날짜에 잊지 않고 심는 모양이다.


김장배추를 서울 한복판에서 키워 먹는다는 것, 내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구청마다 텃밭 분양을 하는데, 운이 좋아서 김장배추를 키워서 김장김치까지 해 먹었다. 그런데 두 번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 후로는 다른 텃밭 구경을 하면서 대리만족을 하고 있을 뿐이다. 김장배추가 커지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은 정말 다른 작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금방이라도 흐믈흐믈 녹아버릴 듯 작은 모종이 뿌리가 잘 내리는 순간 매일매일 다른 모습으로 커간다. 잎이 넓어지면서 속이 차오르는데 꼭 묶어주지 않아도 속은 통통해졌다. 몸집이 어느 정도 되면 배추는 쓰러지지 않는다. 다만 배추벌레가 열심히 먹어서 구멍을 뚫어 버리는 것 말고는 걱정이 없다.


치원에 심어진 배추도 모종을 심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흰나비들을 귀신같이 날아들었다. 갈 때마다 배춧잎 구멍이 숭숭 커졌다. 특히 가운데보다는 테두리에 심어진 배추들이 심하게 공격당하고 있는 중이다.


벌레들도 주변에 새들이 많으면 활개를 치지 못하지만 그보다도 날씨가 문제다. 찬바람이 강해질수록 외투를 단단히 걸쳐 입듯 배춧잎도 겹겹이 무장을 하는데, 배추를 수확하기 전까지 배추 구경은 산책코스에 빠지지 않을 듯싶다.


배추가 심어진 텃밭

지난주에 배춧잎이 몰라보게 커지는데 모종 하나만 처음 심은 그대로였다. 왠지 혼자 자라지 못한 이유가 있은 가 싶었지만 유독 쉽지 않은 아이처럼 적응이 늦는 듯했다.

손바닥 만해진 배추사이로 꼼짝 안 하는 배추를 보면서 팻말에 쓰인 이름이 보였다. 배추 하나에 이름 하나씩 쓰여 있는데, 배추 모종을 하나씩 심었나 보다.

자기가 심은 자리를 기억하지 못해도 이름이 있으니 쉽게 찾을 듯했다. 그런데 한 아이 껐만 배추가 노란 잎을 하고 크지 않아서 걱정되었다. 아이가 실망하지 않으려면 배추가 힘을 내야 했다. 배추 키울 때가 떠올랐다. 모종이 다 죽은 줄 았았는데, 결국엔 김장 배추로 잘 자랐다.

내가 키운 배추보다 그 아이의 배추는 상태가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매일 찾아간다고 하고는 비가 오고 며칠을 가보지 못했다.

덥수룩해진 배추는 멀리서 봐도 눈에 보였다. 그리고 작아서 눈에 띄던 배추가 그래도 뿌리를 내린 모양이다. 훨씬 몸집이 큰 배추들 틈에서도 멀쩡하게 자랐다. 이름표는 배춧잎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 별일 아닌 것에 걱정이 많다. 뒤죽박죽 떠오르는 걱정을 멈추려고 집 밖으로 산책을 나서는데, 또 배추 덕분에 또 하나를 배웠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을 나 혼자 벌벌 졸아 있을 때가 있다. 아닌 척 해도 쉽게 멈추지 않는다. 또 잊어버리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작정 걷다 보면 꽃을 보던 나무를 보던 감탄할 무언가가 딴생각이 들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길 건너 아파트엔 주민이 하는 텃밭이 있다.

유치원 텃밭엔 배추가 잘 자라는데, 두 블록 떨어진 동네 텃밭은 사정이 다르다. 동네 텃밭엔 경쟁하듯 배추 모종을 키웠는데, 올해는 한 곳만 김장배추를 심었다. 하긴 작년엔 배추 농사를 다 망쳐서 가을 수확이 별 볼 일 없었다. 그래서일까? 올해는 여름까지 버틴 모종들을 그냥 두고 키우면서 쪽파나 상추 모종을 심은 듯 보였다.


벌써 3년째 가을이면 유치원 앞마당은 배추가 자란다. 매년 같은 교과서를 갖고 공부하는 아이들처럼 유치원은 가을엔 배추를 심나 보다. 그러고 보니 유치원에 배추는 매년 가을을 배추가 장식하는데 동네 텃밭은 다양한 작물이 있지만 가을 텃밭 풍경이 영 심심했다.


문득 어른이 되고 나니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재미가 없는 듯싶었다. 유치원의 텃밭처럼 가을이면 김장배추를 심고, 봄이면 콩이던 토마토던 심으면 되는 걸 말이다. 계절에 맞는 작물을 심고 키우면 되는데, 작년에 이래서 다른 밭엔 이래서, 핑계가 많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라고 해도 나도 그런 일들을 떠올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을이면 배추를 키우듯, 가을이니 글을 써야겠다. 사랑과 용기를 담고 희망을 주는 이야기를 말이다.


농부가 배추를 심긴 하겠지만, 키우는 건 자연이 하는 일이다. 미리 겁을 먹을 일도 아니고, 예측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과정을 경험하는 일에 너무 얽매이지 말아야겠다. 가을 내내 배추를 구경하면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듯싶다. 아니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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