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이면 텃밭 모집공고를 눈여겨보았다가 신청을 했었다. 그런데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서둘러 구청 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신청기간은 이틀 전까지였고, 이미 마감된 공고는 당첨일자 안내만 보였다.
작년엔 신청했지만 탈락이었고, 올해는 신청조차 못했다. 텃밭 빈 흙에 이것저것 심는 재미는 놓쳤지만, 베란다 텃밭상자에서 꼼지락꼼지락 텃밭놀이를 할 기회는 남아있었다. 이미 상자엔 자른 대파, 자른 무, 자른 감자가 심어져 있다. 그 이유는 씨앗 종자를 심은 것이 아니여서다.
대파는 늘 습관처럼 뿌리 위 5cm 정도 잘라 꼬박꼬박 텃밭상자에 심는다. 대파는 늘 사다 놓지만 갑자기 뚝 떨어졌을 땐 요긴하다. 냉장고에 대파가 떨어질 때마다 텃밭상자에서 잘라서 쓴다. 풍미가 떨어지고 줄기가 가늘지만 한 두 번은 키워서 쓸 수 있으니, 매번 새로운 대파 뿌리가 나올 때마다 텃밭상자에 심어둔다.
겨울에 산 감자는 실온에 두면서 음식을 해 먹기 좋지만, 날이 풀릴 때가 되면 꼭 싹 난 감자가 생긴다. 텃밭에 심어 둘 씨감자로 쓸 수 있으니 한 두 개를 늘 보관해 둔다. 하지만 텃밭은 구경도 못할 신세니 싹이 난 감자를 텃밭상자에 심어야 했다. 그리고 며칠 만에 제대로 된 싹이 3개가 올라왔다.
작년 연말이었다. 무를 사다가 깍두기를 담가 먹고는 무청이 달린 위 부분을 잘라두었다. 잘린 당근처럼 한번 키워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릇에 물을 넣어 두었더니 무청이 새로 돋아 났다 겨울 내내 부엌에서 지내던 무를 얼마 전에 텃밭상자로 옮겨주었다. 뿌리가 내려온 것은 아닌데, 흙을 덮어주었더니 시들지도 않고 초록잎이 더 돋아 났다.
텃밭 상자는 내게 쓸모가 많다.
수확을 위한 거라기보다는 실험 같은 걸까? 취미나 놀이일까? 나는 뭔가 키우는 걸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땅 속에 뿌리를 박고 크는 초록 식물들이 내 관심을 끈다.
화초들도 키우지만 그들에겐 모험이란 없다. 화분마다 물 주기에 맞춰 관리해 주고 계절에 맞게 화분을 옮겨준다. 하지만 텃밭 상자는 좀 다르다. 실험실 같은 용도이기 때문이다. 나의 호기심이 대부분 텃밭상자에서 자란다.
종자를 사서 파종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활용에 가까운 작물들이 자란다. 시들지 않고 잘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예상치 못한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운이 좋아 수확까지 가는 경우도 있지만, 수없이 실패하는 경험들이 그곳에서 자랐다.
춘분이 지난 오늘 텃밭 상자에 작고 귀여운 손님이 찾아왔다. 자른 무에서 꽃대가 올라와 장다리꽃이 피었다.꽃 한 송이 옆에도 꽃봉오리가 여럿 달려 있으니 한동안은 꽃구경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모한 호기심인 줄 알았는데 장다리꽃으로 피었으니, 텃밭상자는 확실히 내편인가 보다.
예전부터 무의 종자를 받기 위해서 장다리 꽃을 키웠다고 하니 얼마 뒤엔 씨앗이 여물지도 모르겠다. 자른 무가 얼마나 꽃을 더 피울지 기다려볼 참이다. 꽃이 핀 것도 반가운데, 시든 꽃이 씨앗을 선물로 주고 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