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 젖은 채로 내버려 두었다

비 오는 날

by 무쌍


길가에 마주치는 야생화들을 좋아한다. 야생화를 감상할 기회를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아도, 지나가는 행인일 뿐인 내게도 언제나 다정다. 꽃들이 마의 손길을 기다리는 아처럼 보여서일까? 일일이 마주 보며 걸었다.


빤히 나를 보는 꽃도 있지만, 숨어 있는 꽃들을 찾아내는 일도 내겐 흥미롭다. 회양목 담장에 불쑥 솟은 꽃범의 꼬리, 느티나무에 기대어 긴 계요등 가지를 하나 붙잡고 꽃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화단 중앙을 지키던 꽃무릇은 젖은 머리를 화단 밖으로 걸쳐두었고, 행나무 아래 덥수룩해진 강아지풀 빗방울이 그렁그렁 쏟아질 듯했다. 나팔꽃은 시든 꽃잎이 말리기도 전에 찢어졌고, 잔디밭에 숨었던 부추는 흰 꽃다발을 세웠지만 어제 핀 해바라기 가려버렸다.


가랑비가 장악해 버린 거리엔, 비에 젖은 야생화들도 사연이 많아 보였다. 내리는 비에 젖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젖은 채로 비를 계속 맞고 있었다. 집에서 멀어질수록 신고 있는 운동화도 젖었다.


여름도 끝자락임과 동시에 가을은 시작이다. 곧 겨울도 달려올 테니 여유를 부릴 수도 없었다. 비가 종일 내리지만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여러 가지 핑계들이 있었지만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빛난 그 어떤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사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며 피는 꽃" 이란 도종환 시인의 구절이다.

매일 화단식물에 물을 주면서는 몰랐는데, 종일 내린 비에 푹 젖은 꽃을 보니 이 시가 떠올랐다. 목이 말라 마시는 물은 갈증을 풀어주며 기운이 돋게 하겠지만, 주는 대로 받아마셔야 하는 일은 곤혹일지도 모른다.


쉽게 단념하지 못했었는데, 돌아오는 마음은 후련했다. 방금 보았던 꽃들이 새삼 다른 표정이었다. 스쳐 지나가면서 볼 뿐인데도 야생화에겐 믿을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작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화지만 자신이 세운 자리를 지키고 최후까지 버텨낼 것을 믿고 싶었다.



하라는 대로 살기는 어렵지 않았는데, 계속 시키는 걸 하려니 싫어졌다. 관습대로 사는 일은 뻔한 것들이다.

나를 지켜가면서 살아가는 일을 하나씩 배우다 보니 이곳까지 긴 왔지만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나를 위한 일이라고 했지만, 내 호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 아니었다. 가족이란 이유로 얽힌 문제 중 마지막은 돈이라니 너무 뻔한 드라마여서 일까. 이제 마지막 단계가 되었다. 은행문을 나서면서 과거와의 조용한 손절을 할 날짜가 정해졌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었지만, 비에 젖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축축하고 찝찝한 기분을 한발 한발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젖은 꽃잎을 보았더니 마음이 촉촉해지고 시력이 좋아진 듯 선명해졌다. 빨갛고 붉고 열정적인 꽃잎들만 골라서 사진을 찍으며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한산한 거리에 빠른 걸음을 걷는 사람들은 여행용 가방에 달린 바퀴 소리를 요란하게 냈다.

'어디로 가는 걸까?' 가족이 기다리는 곳인지, 낯설고 낭만적인 여행지인지 알 수 없지만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여유가 느껴졌다. 불행은 등 뒤에 숨어 있었지만, 행복은 꽃 한 송이처럼 선명하게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 내린 비가 내일이면 더 건강한 꽃들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감정을 느낀다.

말 못 할 사연이 있다고 하더라도, 의미를 어떻게 부여할 것인지에 따라 감정은 달라질 수 있었다. 숨은 사연은 단어 뒤에 감추어 두고서 글쓰기가 지켜준 일상에 너무도 감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글쓰기는 의미와 감정을 가장 최선으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기록되는 글의 의미를 되짚어가다 보면 천천히 끓어오르는 행복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 비에 젖은 운동화를 깨끗하게 빨아서 말리면 오늘도 지난 일이 될 것이다. 대신에 종일 내린 비를 맞으며 감정을 푹 젖은 채로 내버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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