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책갈피엔 이 글이 쓰인 스티커가 붙어 있다. 도서관 이벤트에서 받은 도서에 들어 있던 스티커 중에 하나였다. 얇고 가벼운 책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책 속에 이 문장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때는 이 명문장을 쓴 작가가 부러웠지만 지금은 이 말을 이해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에 더 감사해진다.
오늘도 이 문장은 나를 위로해 주었다.
매일 몸이 가뿐하진 않기 때문이다. 어둑한 하늘은 안개를 자욱하게 드리워서 인지 나른한 오후처럼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간밤에 잘 자고 일어났는데 악몽을 꾼 것처럼 개운하지 않았다.
늘 가는 산책로가 공사 중어서 또 중랑천 수변공원으로 향했다. 보이는 건 가을 물이 들어가는 청단풍나무와 흐르는 중랑천 위를 오가는 철새들이었다. 온통 비눗물처럼 뿌였게 뒤집어쓴 하늘에서 말끔한 풍경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그나마 코스모스 꽃밭에서 맡아지는 꽃향이 잠시 흥분시키는 듯했지만, 뿌연 하늘을 보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버렸다.
아침 산책을 거르지 않으려고 나왔지만, 영 내키지 않은 기분은 금방 사라질 생각이 없었다. 부지런한 손들은 벌써 수변공원의 화단을 싹 정리해 두었고, 잘린 나뭇가지들은 무덤처럼 띄엄띄엄 생겼다. 철새들이 먹이 사냥을 하는 모습을 대단한 사건인 듯 바라보았지만, 그마저도 심심해졌다.
무거운 공기와 잔잔한 물기운이 강력하고 우중충한 목소리로 나를 귀찮게 했다. 얼마나 견뎠을까.
초록 풀밭에 할머니들이 쪼그려 앉은 채 무언가를 하고 계셨다.
잠시뒤 할머니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길가에 앉은 할머니와 수변공원 안쪽에 깊게 들어간 할머니, 그 사이를 오가는 할머니 모두 세분이었다.
" 뭘 그렇게 찾아요?"
" 아.. 네 잎클로버 찾아요." 길가에 앉은 할머니가 대답했다.
" 손에 든 건 뭐예요?"
" 고들빼기 좀 뜯는 거예요." 손에 든 걸 보여주며 할머니가 대답했다.
사이를 오가던 할머니가 "깔깔깔" 웃으셨다.
네 잎글로버를 찾던 할머니가 따라 웃으셨고, 결국 고들빼기를 뜯던 할머니도 웃으셨다.
느린 걸음으로 그 풍경을 지나가던 나도 웃음이 났다.
같은 풀밭에서 각기 다른 것을 찾는 할머니들의 일상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내가 할머니가 되면 어떤 할머니가 되어있을지 말이다.
안 그래도 집 앞 화단에서 네 잎클로버를 찾았었는데, 나는 할머니가 되어도 찾고 있으려나? 아니면 호기심이 여전해서 뭘 하는지 참견하는 할머니가 되어있으려나?
그런데 고들빼기를 뜯는 할머니는 그만두셨으면 싶었다. 바로 옆에 "하천 나물 채취하지 마세요." 5년 이하의 징역 및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라고 함께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네 잎클로버를 찾는 것도 다를 것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도시의 할머니들은 옛날 추억을 되살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고들빼기를 뜯던 할머니는 걱정이 되었지만, 드시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예전처럼 하천에 난 냉이나 쑥 같은 나물을 먹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파릇파릇 돋아난 고들빼기 이파리와 네 잎 클로버를 그냥 지나칠 수 없던 마음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으니 자연도 남은 힘을 내고 있었다.
양지바른 곳, 따뜻한 온기가 든든했는지 언덕 위까지 온갖 야생초들이 연두색 새잎을 돋아냈기 때문이다.
우리가 쏟아낸 독성을 자연이 온전히 먹고 토해내지만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초록 풀밭은 우리에게 위험하다고 경고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돈돈돈 어딜 가나 물가가 올랐다는 소리가 참 답답해진다. 안 그래도 아끼는 것이 익숙한 할머니들 일 텐데 말이다. 그래도 중랑천에서 만난 세분의 할머니가 즐거워 보였다. 종종 꽃밭에 잡초를 뽑는 할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꽃밭을 가꾸는 일손이 아닌데도 말이다.
같은 곳에서 만난 할머니들인데도 삶은 모두 다른 색이었다.
자연에서 우리들이 얻어가는 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인 듯싶다.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즐거워지는데, 잠시 어린아이처럼 풀밭에서 웃는 할머니들을 지나 구름 뒤로 해가 나오는 걸 보며 좀 더 걸었다.
그러고 보니 자연도 저마다의 이유로 힘을 내는 듯싶다. 지루한 산책인 줄 알았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평소보다 더 오래 걸렸다. 철새가 해마다 찾아오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싱그러운 풀냄새가 진동하는 곳을 좀 더 오래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