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은 이미 꽃 모양의 로제트가 되었고, 하나 둘 붉게 물들어가는 긴 잎사귀는 나무 단풍만큼이나 멋스러웠다. 땅에 달라붙은 로제트를 볼 수 있다는 건 야생의 경쾌한 겨울 안부였다.
좀 이른 건 아닌가 싶었지만, 이미 겨울이다. 새로 돋아난 클로버가 눈에 띄었는데 이미 하얗게 서리가 사방에 깔려 있었다. 얼어붙은 보석을 갖고 있는 건 희귀하고 반짝이는 야생의 그림자였다. 태양의 시선을 받은 땅은 빛나며 그림자가 사라졌지만 아직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만이 희귀한 보석을 감싸고돈다.
겨울이 데려온 새 하얀 서리를 구경하느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얼어붙은 클로버는 얼음 마법이 풀릴 듯했지만 툭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잎은 부서져도 뿌리는 땅속에 숨어서 견딜 것이다.
꽃은 뒤에 있고, 집은 멀리 있다.
세상은 더 앞서서 멀리 가야만 한다. 그림자를 드리운 가을태양은 밤이 되기 전에 서늘하고 안개가 불러온 그늘은 구름까지 더해져 어둑하다.
꽃을 뒤로 한채 집으로 향했다. 멀리 더 멀리 사라져 버리면 꽃들도 나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뭔가를 쓰고 싶어서 계속 산책을 나섰는데, 사실은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이 아니라 늦게 핀 꽃을 찍기 위해서였다. 발견을 하다 보면 얻는 충만함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랑천 물가를 걷는 백로를 찍고, 한송이 붉은 클로버꽃을 만났다. 그렇게 야생의 겨울이 드리워진 그림자를 찾는 일은 지루해지지 않았지만, 내 시간을 방해하듯 독한 감기가 아이들에게 찾아왔다.
등교를 해야 할 큰 아이가 목이 아프다고 했다. 병원에서 진료를 하고 등교를 했는데, 오후엔 둘째가 목이 아프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독감검사를 했지만 아니었다. 큰 아이는 열이 없었고, 둘째도 미열만 날 뿐이었다. 반갑지 않은 목감기가 집으로 쳐들어왔고, 꼬박 삼일을 집에 묶인 신세가 되었다. 다행인지 아이들은 밤에만 열이 올랐고, 아주 고열도 아니었다. 기침이 심해져서 더 그런 듯했지만, 지각을 하더라도 꼬박꼬박 등교를 했다.겨우 아이들이 나간 집을 정리하고 나면 아이들은 돌아왔다.
같은 반아이들도 절반은 독감이고, 나머지는 비슷한 감기 몸살을 앓고 있는 듯싶었다. 알고 보니 담임선생님들도 감기 때문에 고생을 하고 계셨다.
코로나에 걸린 이후에 찾아온 감기소동은 잠을 설치며 엄마 역할을 잊지 않았는지 테스트를 했다. 한밤 중에 잠든 아이들을 살피는데, 예전 생각이 많이 났다. 나보다 큰 몸이 되었고, 자다 일어나 화장실을 혼자 다녀오는 아이들을 돌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3일 넘게 잠을 설쳐서 인지 내게도 감기가 왔다. 아이들과 똑같은 증상이었다. 보통은 아이들이 다 나은 후에나 걸리던 내가 너무 빨리 걸려버렸다. 아이들은 완전히 회복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병원 진료를 갔다.
"어머니는 이제 시작하시네요. 증상은 어떠세요?"
"아이와 똑같아요. 목이 아프고 몸살처럼 으슬으슬해요"
"어머니는 아이들보다 더 심하신데요. 목도 많이 부었고, 콧물도 많으세요."
같이 간 아이도 놀란 얼굴이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은 신기하게도 하루 만에 몸살을 날려 보냈다. 목이 아픈 것도 곧 괜찮아졌다. 아직 내 몸은 희귀하고 반짝이는 엄마의 에너지를 갖고 있었다. 내일이면 감기를 내 몸에서 사라질 듯싶었다. 약을 먹고 쉬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쓰레기를 버리러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트로 향했다. 저녁 반찬거리를 장바구니에 넣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큰 아이였다.
"엄마 동생 열나. 해열제 어디있어?" 남편도 놀란 목소리로 옆에서 해열제가 안 보인다고 했다. 분명 약을 두는 선반에 있었는데...
"여기 찾았다. 선반에서 떨어졌네."
선반에 올려 두면서 아래 떨어졌었나 보다. 꼭 내가 집에 없을 때 일은 생기는 건가? 뭐 한다고 했는데, 해열제는 왜 떨어진 건지.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소동이 또 벌어졌다.
장바구니에 넣은 물건을 계산하고 집으로 달렸다. 아이가 걱정은 되고 집은 가까워져 가는데, 머릿속엔 다른 생각도 났다.
' 언제면 겨울 산책을 혼자서 나설 수 있을까.'
반가운 건 야생에서 빛나는 겨울이지만, 해결해야 할 건 집으로 찾아온 감기 손님이었다.
희귀하고 반짝이는 엄마의 에너지를 다 쓰고 나면, 기회는 오겠지만 감기 소동은 며칠 더 이어질 듯싶다.
처방받아 온 약병은 빈통이 되었지만, 아이는 코를 닦느라 휴지를 들고 다닌다. 이번 감기는 겨울 추위보다 더 고단하게 느껴졌다. 아픈 건 애들인데 엄마 노릇이 고달프다는 기분 때문이다. 초보 엄마 시절은 한 번씩 호된 감기가 지나가면 나만 고단한 인생을 건너는 건 아닌지 서글폈다. 그런 기분도 나이가 들수록, 애들이 커갈수록 달라졌다.
내가 하는 이런저런 고민이 대단한 것 같았지만, 오늘처럼 아이들이 동시에 감기라도 걸리면 세상에 문제는 단 하나만 남는다. 아이들에게 찾아온 감기가 무사히 지나가는 것이다.
감기를 이겨내고 있는 아이들은 또 훌쩍 자란 듯 보였다. 오랜만에 엄마노릇을 한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