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노트

계란말이와 수다쟁이

도시락의 시간

by 무쌍

언제인지 어디인지 희미했다.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이 떠올랐지만 정확한 이름도 맛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허전한 마음 때문인지, 허기진 속 때문인지 다른 사람의 손에 만들어진 음식이 먹고 싶었다. 나만을 위해 준비된 도시락을 먹는 기분을 책 한 권이 선사해 주었다.


아내는 글을 쓰고 남편을 사진을 찍는 일본 작가부부의 책이다. <도시락의 시간> 이란 책은 도시락 반찬을 만들거나 예쁜 도시락을 싸는 법이 담겨 있지 않다. 요리 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시락 맛집을 소개하는 책도 아니다.


작가 부부는 한 항공사의 기내에 비치되는 잡지에 <도시락의 시간>이란 코너를 연재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가 마침내 책 한 권이 된 것이다. 도시락 뚜껑을 열어 사진을 찍고 도시락 주인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도시락을 누가 싸주는지 같은 소소한 궁금증을 묻고 답하는 글이다. 도시락을 앞에 두고 하는 인터뷰인 샘이다.

포근한 맛이 생각날 때, 특히 추운 계절이 되면 읽게 된다. 년 겨울 채비를 하듯 이맘때면 이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

책을 구입할 타이밍을 놓친 후론 도서관에서 빌려본다.

책 제목은 선명한데 서가에서 길을 잃었다. 번에도 요리 분야에서 서성거리다가 도서 검색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도시락의 시간>은 음식과 관련된 분류가 아닌 에세이 분야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번 이 책을 찾는데 시간을 허비해서 인지, 책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책 속엔 매일 똑같은 일을 하고 비슷한 일과가 익숙한 사람들이 나온다. 땀을 흘리는 일, 두 손과 다리를 움직이며 정성을 다하는 일을 하는 그들은 모두 느긋한 점심을 먹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 도시락이 더 소중한지도 모르겠다. 밥 위에 올려진 매실 장아찌, 우리의 김치가 그러하듯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유난히 눈에 띄는 건 계란말이였다. 나의 계란말이는 늘 헐렁해서 이불을 말아놓은 것 같은데, 책에는 정말 다양한 계란말이가 등장한다. 서로 다른 우리 얼굴처럼 말이다. 다른 나라지만 도시락 이야기는 참 신기했다. 작가도 같은 말을 여러 번 했다.

신기하다.


작가가 발굴한 도시락의 시간은 특별했다. 그리고 그들의 인맥을 무척 흥미로웠다. 도시락으로 만난 사이지만 매년 연하장을 주고받는 그들이 신기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뭉클해졌다. 잔잔하지만 깊은 인상을 주는 그 책 때문에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하는 일이 더 좋아지기도 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요리 프로그램에서 계란말이 하는 법을 배웠다. 계란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 줄도 몰랐고, 손이 많이 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덜렁대면 계란말이도 엉성해졌다.


노트에 빽빽하게 글을 쓰듯이 차근차근 연결해야 촉촉하고 푹신한 계란말이가 만들어졌다. 일정한 열정을 갖고 차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입을 꾹 다문채 집중해야 한다. 익어가는 계란물이 통통하게 엉겨 붙는 모습을 보면 아이를 꼭 감싸 않은 듯 사랑이 느껴졌다. 아 이래서 계란말이가 특별해지는 거구나 었다.



도시락에는 만드는 사람의 성격이 나오지, 어머니의 도시락은 마치 선을 그어놓은 듯한 사각형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초등학교 때 인가 도시락을 여니까 친구들이 모여들어서 내 계란말이를 먹고 싶어 안달인 거야.
"야쿠타가와의 계란말이는 노른자만 쓴다."라는 소문까지 날 정도였으니까. 사실 그런 게 아닌데 말이야.
그저 샛노란 황색만 보이고 흰색이 안 보이니까 그런 소문이 난 거야. 어머니가 꼼꼼한 성격이라서 아주 열심히 달걀을 잘 저은 다음 몇 번이고 얇게 말았던 것뿐이거든
- 책 <도시락의 시간> 중에서

사진가인 아쿠타가와 씨는 아내의 도시락이야기도 이어갔다. 아내의 계란말이는 흰색이 많이 보이기도 하지만 태우기도 한다고 했다. 게다가 자신을 살 찌울 생각에 도시락을 너무 꾹꾹 눌러 담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진 속 도시락 주인공은 정말 깡마른 몸이었다. 아내의 마음을 잘 알듯 싶었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고 온 남편, 위 내시경을 하고 속이 좋지 않다고 했다. 입맛은 없는데 죽을 계속 먹는 일도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자극적이지 않은 반찬을 하려니 계란만 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계란말이는 끼니때마다 언제나 환영을 받았다.

특별 것 없는 노른자가 터지지 않은 귀여운 반숙 프라이도 반가워하지만, 가족들은 빵처럼 부풀고 촉촉한 계란말이를 더 좋아다.



계란을 꺼내 손목이 뻐근할 정도로 저어서 연한 노란색이 될 때까지 섞었다. 치즈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서 슬라이스 치즈를 안에 넣고 둘둘 말았다. 녹은 치즈가 계란에 섞이며 녹아내리는 냄새가 고소했다. 오늘의 계란말이는 몇 번을 감았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시간이 걸렸다.

수다쟁이처럼 쉴 틈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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