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노트

가을 발소리를 낸다

후반전을 앞두고

by 무쌍

태양의 표지판은 종료라고 알림이 떴다.

서둘러 집으로 가야 했다.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방향은 정서 쪽이었다. 말릴 새도 없이 태양은 곧바로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앞을 똑바로 볼 수 없어서 그만 고개를 숙였다. 바닥은 온통 금빛이었고, 내 몸도 비슷한 색으로 빛이 났다. 손바닥 그늘로 겨우 가렸는데, 바람이 한차례 찰랑거리더니 비가 솟아지듯 후드득 소리를 내며 나뭇잎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대추나무였다. 대추나무가 가장 먼저 낙엽을 뿌리는 중인가 보다. 진한 갈색으로 익은 대추도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열매가 완전히 익기도 전에 이파리를 처분하고 있었다. 어쩌면 둘을 한꺼번에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무는 벌써 휑했고, 누군가 이미 딴 건지 대추도 듬성듬성 남았다.


가을의 발소리는 곧 바스락 거리며 겨울을 불러올 것이다.

가을이 속도를 높이며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길 위엔 벌써 낙엽들이 시선을 끌고 있었다.


낙엽을 줍나 싶었는데, 밤을 꼭 닮은 마로니에 나무 열매를 경쟁하듯 주워가는 할아버지 두 분을 보았다. 그 열매로 무얼 하실까? 묻고 싶었지만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2023.9.12( 낙엽의 출현)


계절이 바뀌는 풍경을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휠체어에 앉은 한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작고 귀여운 모자를 쓰고, 동그란 안경에 입꼬리가 알파벳 U자를 하며 웃고 계셨다. 나도 덩달아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낙엽을 같이 바라보고는 곧 각자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휠체어를 미는 사람이 잠시 어디론가 다녀온 모양이었다. 무런 말도 없었지만 나는 그 미소를 잊을 수가 없었다. 에게도 그런 미소를 가질 노년의 시간이 와줄지 궁금해졌다.




안개가 항상 나를 찾아온다.

너는 할 수 없다고, 한계를 지적하고 스스로를 포기하게 하지만,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엽을 떨구듯 소임이 끝난 지난 일들은 툭하고 놓아고 오늘을 쓰고 있다.


서관에 한 서가에 꼼짝 안 하고 서서 책을 읽었다.

흐와 동생 테오가 주고받은 600여 개의 편지를 엮은 책이었다. 비슷한 책이 여러 권 있었지만 가장 가벼워 보이는 책을 꺼내 들었다. 고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또 동생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해서 편지를 썼던 것 같다.

고흐가 "사랑하는 동생 테오"라고 시작하는 편지의 첫인사말이 상투적인 것 같지 않고 진심인 듯 느껴졌다.


자신의 그림이 누군가에게 팔리지 않아도, 그림을 의뢰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는 항상 동생에게 꼭 보관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림이 알려질 것을, 사람들이 좋아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가난한 현실이 답답한 고흐였지만 포기하지 않은 화가의 삶은 깊은 유산으로 우리 곁에 남았다. 도서관 한 책장이 고흐의 그림과 글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지식인들의 책으로 꽂혀 있었다. 어떤 책을 펼쳐도 고흐가 남긴 열정을 느낄 수 있을 듯싶었다.


가난은 기침처럼 숨길 수 없다고 하지만, 내겐 숨길 수 없는 것은 쓰다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인 듯싶다. 고흐처럼 돈을 주고 모델을 쓰고 물감과 붓, 캠버스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말짱한 키보드를 두드리면 되는 일인데 말이다.

안개도 구름의 일종인 것을 그 뒤엔 맑은 하늘이 있다는 걸 자꾸 잊어버린다. 회색으로 뒤덮고 있던 주변을 지는 태양이 황금색으로 바꾸어 놓았다. 을 발소리를 내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책상에 앉았다.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 새겨진 유리잔에 찬우유를 넣고 밀크커피를 만들었다.

커피를 마시고 나니 고흐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1888년 그가 그린 해바라기는 2023년에도 쉼 없이 피어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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