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겉옷을 꺼내보니 예전 모습 그대로인 친구 얼굴을 보는 듯했다. 그런데 내 몸은 몸무게가 달라진 것도 아닌데 옷이 작은 듯 어색했다. 한동안 입지 않아서 인지 옷에서 풍기는 향기가 익숙해지지 않았다.
다시 겨울이라니 단단히 무장을 해서 나섰는데, 너무 엄살을 떨었나 싶었다.
낙엽을 쓸어 담는 분들은 얇은 셔츠 차림인데도 땀을 흘리시는 듯 보였다. 화단에선 양팔을 걷어 부친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비어 있던 화단이었다. 장아찌용 양파 만한 구근들이 표시된 고랑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작년에도 봤던 그 풍경이 반복된다면 수선화와 튤립 구근들을 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작년 봄에도 그전 봄날에도 꽃들은 근사하게 피어 사람들을 불러모았는데 말이다.
꽃핀 모습만 보았지 작업을 하는 건 처음 보았다. 전날에 화단에 새 흙이 부어지는 걸 봤는데, 봄을 심으려고 준비를 하던 참이었나 보다. 반대쪽 공원 화단엔 꽃양배추를 심고 있었는데, 매년 튤립 화단으로 변신하는 화단이었던 것이다. 꽃만 보았지 가을에 구근을 미리 심는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맞다. 그냥 벌어지는 일은 없다.
수선화를 좋아하시던 타샤 튜더 할머니도 매년 구근을 주문하느라 전화를 붙잡고 계셨다는데, 늦가을 심은 구근은 겨우내 땅속에서 봄을 준비할 것이다. 할머니는 구근이 두더지나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지 않기를 바라셨지만 겨울을 나는 동안 사라지는 구근을 막아낼 수는 없으셨던 것 같다. 할머니의 정원을 떠올리며 화단에 심어지는 구근들도 무탈하게 겨울을 보내주길 꽃으로 피어나길 지켜볼 참이다.
연두색 잎이 땅 위로 올라와 줄기를 세우고 봉오리가 될 때까지 모두 같은 색이지만, 꽃이 필 때가 되면 꽃은 빨강, 분홍, 노랑, 하얀색으로 꽃봉오리가 바뀐다. 처음엔 눈치 못했지만, 꽃은 일단 피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다. 봄이 오면 말이다. 특히 수선화가 꽃다발처럼 솟아나듯 무리 지어 피어나면 그 탐스러운 꽃송이를 또 볼 수 있으니 무척 기대가 되었다.
2023.11.8 구근심기
봄이 오면 무슨 색으로 피어날지 상상하며, 산책길은 더욱 설렌 기분이 들었다. 꽃이 필 거란 기대 만으로도 흥분되는데, 준비된 것이 있다면 훨씬 미래는 기다려질 것이다. 나의 봄은 무엇으로 반짝이게 할 수 있을까?
겨울은 봄은 준비하는 시간이다. 충분히 낙엽을 모으고, 미리 심어야 할 구근을 땅에 묻고, 불필요한 이파리와 잔 가지들을 정리하고, 웅크리고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래서일까. 글 쓰는 사람은 매일 무엇이든 받아 적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쓰는 일은 놓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글을 쓰기 위한 '준비'가 바로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작정하고 하려면 쉽지 않은 것이 글쓰기였다. 머리로는 그럴싸하지만 막상 멋을 부리려고 하는지, 할 말이 뭔지도 모르는 어색한 문장만 범벅이 되어 버렸다.
땅을 파고 구근을 하나씩 놓으며 흙을 덮는 손을 따라 하고 싶었다. 단어 하나를 잡고 줄을 세워본다. 그렇게 오늘도 단어 하나에 감정 하나를 담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