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시끄러운 빗소리 때문인지.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말도 안 되는 무서운 꿈이었다. 그렇다고 복권에 당첨될 만한 꿈도 아니었지만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가 되면 잠을 자는지 보초를 서는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열이 나는 아이를 돌보느라 앉아서 자는 일도 허다했는데, 모처럼 꿈을 꾸면서 잠을 제대로 잔 것 같았다. 비바람이 부는 밖을 나가려니 아이들도 쉽게 눈을 뜨지 못했지만 후다닥 등교 소동은 금방 끝이 났다.
밤을 오롯이 나 혼자 보내고 아침이 왔지만, 창밖너머 보이는 풍경은 간밤에 꾼 꿈만큼이나 어지러웠다. 과거의 업보는 폭풍우처럼 큰 소음을 내며 간밤에 내 꿈에서 재현되었다. 아직 꿈에서 깨지 않은 건지 바깥풍경과 헷갈릴 정도로 거칠고 느닷없었다.
북쪽 창 너머 보이는 느티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바들바들 떨면서 폭풍우가 언제 끝날지 겁먹는 듯싶었다.
그 소용돌이에선 아무도 벗어날 수 없었다. 가을이 큰 문턱을 넘는 거대한 폭풍우는 얼음 같은 눈이라도 쏟아낼 듯 냉정하기만 했다.
2023.11.6
일기예보를 보니 잠시 비가 멈추는 시간이 있었다. 말끔하게 하늘이 열리고 태양이 보였다. 길을 나섰지만 작은 구름이 데리고 오는 비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쏟아졌다. 같은 공원에 있지만 나는 우산을 쓰고 건너편에 서 있는 할머니는 맑은 하늘 아래를 걷는다. 이 미스터리한 날씨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미세한 균열이 공기 중에도 있는 건지 바람에 밀려난 공기는 금방 또 비구름이 되어 쏟아지는 듯 보였다. 눈에 보이는 비구름이 멀리 도망가자 파란 하늘이 열렸다.
환해진 거리를 보니 오늘의 승자는 땅인듯했다.
꽃잎도 낙엽과 부러진 가지, 열매, 뒹구는 커피잔까지 모든 것이 땅이 소유했으니 말이다. 하늘은 잠시 올려다봤을 뿐 땅 위에 떨어진 가을을 찍느라 고개를 숙여야 했다.
땅은 모든 것을 다 품으며 가을은 건너고 있었다. 곧 겨울이 올 것이니 서둘러야 했나 보다.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과 단풍잎이 수북하고 가지엔 남은 것이 없었다.
시련이 주는 고통을 피할 수는 없지만, 지나고 보면 모두 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태어난 시간을 바꿀 수 없듯이 과거의 업보라는 것은 선명한 것이었다. 저 대륙 너머 선조들의 업보 때문에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이 안타깝지만 이유는 분명히 있지 않은가.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지배한다. 그 유산이 악행에 대한 업보라고 해도 대물림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복수심은 거친 자연만큼이나 매섭게 느껴졌다.
나쁜 업보를 가졌다는 건 후회할 수도, 잊을 수도 없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을 내가 막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선행은 선행을 악행은 악행을 부른다는 인과응보의 뜻이 업보라면 더더군다나 나는 갈길이 정해져 있었다.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완전히 가을을 버려야 했다.
과오를 물려주지 않을 수는 있으니, 나의 소임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가을이 넘는 큰 문턱을 따라 나도 환승을 하기로 했다. 오늘 밤 다시 악몽으로 찾아온다고 해도 그건 폭풍우가 남긴 작은 바람일 거란 걸 예상할 수 있었다.
땅 위에 떨어진 낙엽처럼 겨울 속으로 다 덮어두기로 했다. 그건 명백하게 나를 위한 것이고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
늦은 오후, 강풍은 완전히 떠나지 않고 있었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아이의 하굣길에 마중을 나섰다. 아이가 보고 싶었다. 집에 와도 엄마보다 더 좋아하는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겠지만, 길 위에서 아이와 나누는 수다가 그리웠다.
급식 먹은 이야기부터시작하더니, 숙제를 안 한 친구들이 많아서 숙제해 간 자신은 칭찬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가방에서 작은 사탕 봉지를 꺼내더니 '엄마, 아!' 하며 연분홍색 동그란 사탕하나를 건넸다. 선생님이 숙제해 온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셨다면서 배시시 웃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하늘은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 사탕이 달콤한 것인지 아이의 마음이 고마워서 인지는 모르지만 서늘했던 가슴에 온기가 돌았다.
가을은 새벽부터 악몽을 꾼 듯했지만, 이제 큰 문턱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 폭풍우가 지나가면 겨울이 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