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에 한 약속

꽃양배추

by 무쌍

우린 겨울에 만나기로 했다. 그렇다고 꼭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얼마 전 공원 정원에 줄 맞춰 심어진 걸 보니 반가웠다.


눈이 소복하게 쌓이면 꽃양배추가 차갑게 언 듯싶지만 처음 심어놓을 때보다는 시들해진 듯 보였다. 안 그래도 갑자기 떨어진 온도에 공원 화단은 더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


쓸쓸하기도 냉정하기도 한 바람에도 멀쩡한 건 사철나무와 꽃양배추가 다 인 듯싶었다.

시든 화초들 사이에 남은 꽃송이가 있는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없었다. 없다는 걸 알면서도 두리번거리는 건 가을까지 했던 버릇이 남아서였다. 겨울의 한가운데 서 있으면서 도 인정하지 못했다.



"당신 자신을 자기 이외의 곳에서 찾지 말라."


에머슨의 책을 펼치고 첫 페이지에 문장을 읽었는데, 다음 장으로 넘겨지지가 않았다. 같은 문장을 몇 번을 들여다보는데도 이 문장이 낯설어 보였다.

그 문장이 내게 말을 걸었지만, 금방 대답할 수 없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보듯 나의 내면도 그대로 볼 수 있는 거울이 있다면 좋겠다. 을 덮어두고 산책을 나섰지만 자꾸 그 문장이 맴돌았다.


꽃을 좇아 다니던 계절엔 몰랐지만, 겨울이 되면 알게 된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반복된 일상이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뿐이었다.


겨울정원에 남은 꽃잎을 두리번거리고, 꽃양배추가 아직 잘 있는지 둘러보는 것은 책상에 앉기 싫어 둘러댄 핑계였다.

겨울에 만나기로 한 꽃양배추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다시 꽃양배추를 만날 때는 다른 내가 되어 있기를, 좀 더 신실한 글을 쓰는 내가 되어 있기를 지난겨울에 약속했었다. 꽃양배추는 약속을 지켰지만,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같다. 어쩌겠는가.

"미안, 글을 많이 쓰지 못했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웃어버렸다. 아무리 보아도 성격 좋은 건 딱 봐도 내가 아니라 꽃양배추 쪽인 게 맞았다. 예쁜 분홍빛 이파리가 훨씬 더 빛이 났다. 언제쯤 반짝일 수 있을까.

나를 찾는 일은 언제까지라는 기간을 정해두며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로부터 지금, 그리고 앞으로 쓰게 될 나의 글이 증명해 줄 일이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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