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노트

소란하지 않은 날

12월 25일

by 무쌍

아무 때나 전화벨이 울리고 초인종이 울렸다.

그 무렵 나는 혼자 지내고 싶다는 기분에 빠져 있었다.


앨리스 먼로처럼 집필공간이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작업실'은 왠지 너무 거창하게 느껴졌다. 버지니아 울프처럼 '작가의 방'도 좋을 듯했지만, 내 방식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학교를 다니고, 글 쓰는 남편이 조용히 집필을 할 공간이어야 했다. 그래야 나의 시간이 안심되기 때문이다. 자 남겨지면 식구들이 남겨둔 흔적을 그대로 둔 채 식탁 위에서 책을 읽고, 노트를 채웠다.

제인오스틴처럼 가족들이 있는 집안에서 작은 종이에 숨기듯 쓰거나, 홀로 남겨질 때 더 오래 쓰고 싶었다. 가족을 떠나지 않은 채로 글을 쓰는 그녀들처럼 되고 싶었나 보다.


문을 닫아 놓기는 했지만 수시로 찾아오는 타인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사정이 있는 그들의 방문은 나만의 문단속으론 거부하기 어려웠다.




몇 해전 숲으로 이사 왔다.

살던 곳도 아파트였지만 이번은 더 많은 단지가 있는 빌딩 숲이었다. 중랑천과 동네 작은 산 꽃밭에서 지내는 일도 꿈처럼 느껴졌지만, 장소를 바꾸어야 했다. 제주에서 떠나올 때처럼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어야 했다. 한 번도 가지 않은 여행지처럼 낯선 공간이 설레게 했다.


적당히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는 도시는 제주섬에서 보다 살기 편했다. 하지만 곧 새로운 동네에도 아는 사람은 생겼다. 마트 직원, 동네 가게 주인, 아파트 관리 직원, 우유 배달을 해주시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면서 매번 다정함을 가득 넣는다. 도시 아파트 숲 생활에 그분들이 고마움은 정말 많다. 옆집에 사는 분들의 얼굴을 알지만 약간의 거리가 있다. 인사를 나눌 뿐 그들의 삶에 더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사 오기 전에 삶을 버리고 조용히 은둔하며 지내는 일은 엄마 노릇을 하지 않는 시간을 모두 글쓰기에 바칠 수 있게 도와었다.


2023.12.25

나무가 많은 오래된 아파트 숲은 숨어 지내기 참 좋았다. 삼십 년이 넘은 나무들은 어디에도 편입되지 않은 채 세월만 쌓아 놓은 듯 보였다. 마치 나와 동년배처럼 친구 같다. 나목이 된 나뭇가지를 따라 새하얀 눈송이가 쌓인 걸 보니 앞마당에 내 키만 한 눈사람이 보고 싶어졌다. 눈이 내리면 앞마당에 눈을 다 모아서 아빠는 눈사람을 만들었다. 계단 위에 눈은 머리가 되고, 계단 아래 마당 위에 쌓인 눈은 몸통이 되는 눈사람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는 소소한 일에도 영리함을 발휘하시는 분이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정원에 분재들은 늘 꽃이 피고 열매가 달렸는지도 모르겠다.


송이송이 눈꽃송이 함박눈이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니 새삼 어린이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예수가 실제 탄생한 날은 아닐지 모르지만, 12월 25일은 아버지의 생신날이다. 오래전 성탄절에도 눈이 내렸다. 케이크 대신 새로 생긴 유명 피자집 피자를 사들고 갔다. 제주 섬에선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귀한 때였다. 지금이야 제주엔 없는 것이 없고, 심지어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요리가 많다지만 말이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들은 화이트크리스마스는 감흥이 없었다. 춥다고 이불 밖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을 두고, 나만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날 아침 무엇이든 끄적거리고 싶어졌다. 그렇게 나의 작업은 혼자 나설 준비를 하면서 시작된다. 어디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가 되는 것, 그것의 나의 작업 시간이고 작업공간이다.

송이송이 눈이 쌓인 소란하지 않은 날 그래서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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