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만큼 쫄깃한 기름떡

제주 기름떡

by 무쌍

벌써 한 달은 지난 일이다.

팥죽이 먹고 싶어 방앗간에서 찹쌀가루를 사 왔다. 남은 가루를 냉동시켜 두었는데 그만 잊어버렸다. 평소 같으면 팥죽을 몇 번 더 쑤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팥죽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겨울방학이 끝나지 않은 아이 덕분에 냉장고는 채우기가 무섭게 허전해진다. 텅 빈 냉동고는 조금 남았던 냉동 만두도 떨어지고 나니 육수용 멸치와 김, 그리고 덩그러니 날 쳐다보는 것 같은 찹쌀가루 만 남았다.


설날이 코 앞인데 시부모님을 모셔올 수 없으니 며느리 노릇은 한량이 되었다. 코로나가 막 시작되고 어머니가 떠나셨고 바이러스가 잠잠 해지더니 아버지 어머니 곁으로 가셨다. 명절 연휴가 되어도 친정도 시댁도 어른들이 안 계시니 명절음식도 옛말이 되었다. 설날 떡국은 먹겠지만 명절 기분은 나지 않을 듯싶다.


앞으로도 설날이든 추석이든 남편과 아이들 틈에 긴 휴일처럼 보내는 명절 연휴를 보내겠지만 말이다. 국떡도 사고 텅 빈 냉장고도 채울 겸 마트로 향했다. 특별하게 명절음식 준비를 하지 않는 며느리가 되었지만 동네 반찬집에 전 부치는 냄새는 고소했다. 익숙한 냄새가 고향으로 데려다줄 것 같이 반가웠다.




고향 제주엔 명절이면 전을 부치듯 기름떡을 만든다.


냉동된 찹쌀가루를 꺼냈다.

가루가 해동이 될 때까지 집안일을 하면서 고향에서 먹던 기름떡 생각을 했다. 어깨가 뻐근해질 때까지 찹쌀 반죽을 하면 마음도 차분해질 듯싶었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은 반죽에 섞어서 오래전 기억들을 불러왔다. 맛있게 먹는 가족들도 떠오르고 나를 보며 웃던 미소도 생각났다.


머리가 복잡해지면 손이 바쁜 게 가장 좋을 듯싶었다.


반죽하려면 손목과 어깨가 뻐근해지지만 손반죽이 잘 되면 맛이 좋으니 수고를 마다 할 수가 없다. 꾹 눌러 찍어내는 틀이 있으면 좋겠지만 내 살림 도구엔 없다. 유리컵 하나를 꺼냈다. 채서 떨어지는 찹쌀가루는 눈처럼 손에 닿을 때마다 냉기가 차가웠다. 러번 채로 거른 가루는 냉기가 사라지고 하얗게 쌓인 눈이 되었다. 반죽을 할 차례였다.


뜨거운 물을 조금씩 넣으면서 작은 덩어리들을 하나로 뭉쳐서 동그랗게 공처럼 만들었다가 납작하게 눌렀다가 다시 큰 공처럼 만들었다.

잠깐 반죽 덩어리를 숙성해두고 아직 뜯지 않은 해바라기씨유를 꺼냈다. 말끔하게 치운 조리대 위에 기름떡을 식힐 넓은 접시와 황색설탕통, 유리볼을 꺼냈다.


반죽을 다시 주물럭 거리니 머니 집에서 놀던 장면이 스쳐갔다. 도마에 반죽을 얇게 펴서 유리컵으로 꾹꾹 눌러 찍는데 사촌언니랑 마당에서 했던 소꿉놀이도 어렴풋이 지나갔다. 잘 달궈진 프라이팬에 동글동글 귀여운 반죽 올렸다.


약한 불로 기름떡이 천천히 노릇하게 구워지는 동안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오늘따라 기름떡이 맛이 좋다고 가족들이 칭찬일색이다. 아무래도 어린 날의 동심을 데려와 그런가.

귀여운 만큼 쫄깃한 기름떡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예전에 먹었던 녹은 설탕에 촉촉하게 잠긴 딱딱한 기름떡을 맛볼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내가 먹던 기름떡은 제사상에 올리고 남은 하루가 지난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모양이 좋지 않거나, 어른들이 고르지 않은 것들 중에 하나였다.


엄마가 된 뒤로 내가 만든 기름떡은 갓 만들어 바삭하고 쫀득한 찹쌀 꽈배기 같은 맛이었다. 예전에 어른들이 맛보던 기름떡의 맛도 그런 맛이었을까? 하지만 어른들만 먹던 기름떡 맛을 비슷하게 흉내 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설날을 앞두고 나는 동심으로 돌아가 딱딱해진 기름떡을 먹어보고 싶었나 보다. 아쉽지만 하룻밤 지난 기름떡 맛보기는 다음으로 미뤄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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