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다른 사람 말은 잘 안 듣는데, 부모 말도 그렇게 안 듣던 내가 의사가 하는 말은 듣게 되더라."
병원에 다녀오신 아버지가 담배를 끊으며 하시던 말씀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나도 알 듯싶었다.
아버지도 그러셨나 보다. 나도 믿을 사람은 의사뿐이었고, 기댈 것은 갑상선 호르몬제였다. 분명 내 몸인데도 난 아무것도 몰랐다. 의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의사가 말한 대로 하루도 빠짐없이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갑상선 호르몬제를 먹는다. 약통에 약이 줄어들수록 다음 진료일이 가까워졌다.달라질 거란 기대를 품고 진료실에 들어갔다가 똑같은 설명을 듣고,전에 먹던 약을 그대로 처방받는 걸 반복했다.
매주 병원진료를 갔던 첫 한 달이 지나자 한 달 뒤에, 진료는 다시 3개월, 그리고 또 3개월을 보내고 어느덧 10개월이 지났다. 복직을 하려면 앞으로 2개월이 남아있었다.
갑상선 염증이 사라져 호르몬제를 끊을 수 있는 긍정적인 신호를 기다렸다.하지만 나의 간절함에 비하면 병원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병원은 인사 변동이 잦았다. 반년 동안 진료하면서 담당의가 3번이나 바뀌었다.나는 불안했다. 처음 만난 의사가 해주었던 '6개월 지켜볼게요.'라는 희망적인 말에 대답을 기다렸지만, 새로 바뀐 의사에게 나는 수많은 환자 중에 하나였다.
목에 난 혹도 완전히 사라졌고, 아침에 일어나는 일도 나아졌다. 걷지도 못하게 피곤했던 몸도 갑상선 호르몬제를 보충해 주는 것 만으로 움직이는 일에 수월해졌다. 그 무렵 가족 행사가 생기면 외출하기도 했다. 느리지만 나는 되돌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어쩌면 운이 좋은 사람이라 이 정도로 끝이 날지도 모르겠다는소망을품었는지도 모르겠다.
"갑상선은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며?"
한동안 보지 못했던 가족들은 나를 보더니 같은 질문을 했다.
참 신기했다. 안 좋은 소식은 빛의 속도로 펴지더니 급기야 외국에 사는 친구까지 알게 되었다. 암에 걸린 줄 알았는지 수술을 해야 하는지도 물어보기도 했다. 이미 수술을 한 후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정말 주변 사람들에겐 나는 별일이 생긴 사람이었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거야? 직장은 관둔 거야?"라는 질문에 나는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 의사에게 듣지 못했고,회사는 1년간 휴직 상태였다. 치료가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갈 회사였다. 계획대로 될 것이고, 틀리지 않을 거라 믿었지만, 주변에서 하는 말들이 정말 사실처럼 될 까봐 초초해졌다.
진료일, 새로 만난 의사는 짧게 인사를 하더니 말이 없었다.
잠시 뒤, 보고 있던 모니터를 내가 잘 보이는 방향으로 돌렸다.
"잠깐 같이 보실까요?"
의사가 보여준 모니터 화면에는 내 이름이 쓰여 있었고 빽빽한 표 그림에 숫자들이 보였다. 의사는 혈액 검사로 나온 항목에 대해 설명했다.갑상선 호르몬(THS) 수치는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의사의 말로는 건강한 일반인들은 두 자리 숫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네 자리였다. 이 수치가 줄어들지 않으면 다른 대사 질환에도 취약해진다고 했다. 약으로 먹는 호르몬제가 도움을 주긴 해도 아직 불안정한 갑상선이었다.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의미가 없었다.
면역체계를 관장하는 갑상선은 이해하기 어렵고, 아주 복잡한 임무를 하는 듯 보였다. 의사는 내게 호르몬제를 먹고 있지만, 갑상선 지수가 조절되지 않으면신진대사 전반에 영향을 준다고 했다. 콜레스테롤 조절을 못하거나, 간 기능도 영향을 줄 수 있다며,대부분 환자들은 갑상선 호르몬제 외에 다른 질환의 약을 복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갑상선호르몬을 약으로 먹기만 하면 되니치료가 단순하다 싶었는데 내가 너무 만만하게 보았을까.
다음 진료엔 빨간색으로 바뀐 항목들이 늘어났다.
3일 전 채혈검사를 하고 진료를 위해서 병원에 다녀왔다. 그리고 진료일이었다. 의사가 중요한 얘기라도 할까 싶어 남편도 함께 갔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너무 높은데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데, 왜 그렇죠?
의사가 나보다 더 놀란듯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검사결과에 함께 간 남편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어떤 상황인지 몰랐다.모니터 화면에 의사가 가리키는 콜레스테롤과 관련된 항목들이 모두 빨간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식사에 대해선 전에 만난 의사들도 똑같았다.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간 건강식으로 인스턴트음식과 믹스커피는 자주 먹지말라고 말이다. 운동도 조금씩 하면서 가능한 휴식을 자주 가지라고 했다. 딱히 금하는 음식이 있지도 않았고, 주의사항도 없었다. 정말 갑상선 염증 때문에 벌어지는 여파 일까? 병이 깊어지는 것을 걱정하던 마음은 아픈 몸이 어디까지 문제인지 막막했다.
모니터를 보던 의사는 단호했다.
다음 채혈검사에 똑같은 상황이라면 콜레스테롤 수치를 조절하는 약도 함께 먹어야 한다고 말이다.약을 추가로 처방해도 되지만 일단 식이요법을 해보자고 했다. 의사는 음식 섭취에 대한 주의사항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음식을 금지시켰다.달걀(특히노른자), 기름진 돼지고기, 육가공 음식, 치즈, 새우, 알, 오징어는 다음 진료까지 먹지 말라고 했다. 가능하면 육식을 피하고, 채소와 단백질 위주의 식단을 하라고 권했다.발등에 떨어진 불을 먼저 꺼야 했으니,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데 집중했다.
'야채수프'는 기적의 야채수라 불리며, 식이요법으로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듯했다. 야채를 끓인 물을 먹으라니,,, 내키지 않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물론 야채수프는 의사가 권하지도 않았고, 먹어도 되는지 묻지도 않았다. 미신처럼 자연치유의 효과에 기대 보려고 무작정 해본 일이었다. 바뀐 식단에 추가된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
아픈 갑상선과 건강을 위해서 야채수프를 끓여 먹기 시작했다.
야채수프를 만들기 위해서 유리로 된 편수냄비를 샀다.
수프 재료는 무농약이나 유기농으로 구하기 쉬운 채소라서 번거롭지 않았다. 당근, 무, 말린 무청, 우엉, 표고버섯을 넣은 생수를 1시간 끊여 식힌 후 물만 따라서 마셨다. 몸에 나쁠 것이 없는 재료들이었고, 마시는 방법도까다롭지 않았다.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당분간은 고기를 먹지 않을 작정이라 문제는 없었다.
야채수프를 끓일 려고 재료를 손질하다 보면 만지는 손에선 마른 흙냄새가 묻어났다. 표고버섯을 제외하고는 모두 땅속에서 자라니 당연하다 싶었지만 유리 편수에서 끓기 시작하면 더 신기한 냄새가 났다. 한 시간을 우려내는 동안 집안에 뜨거운 흙냄새가 풍겼다. 한여름 태양이 이글거리던 과수원 나무 아래서 맡았던 땅 냄새가 그대로 재현되는 듯 익숙했다.보이는 건 땅 위에 심어진 나무뿐인 시골풍경처럼 소박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향기였다.
맛은 더 신기했다.
모든 재료가 섞인 맛인데 '익은 채소가 각각 섞인 맛'이었다. 전혀 하나의 맛으로 뭉쳐지지 않았다.한 모금 입에 넣은 야채수에선 무청의 씁쓸한 잎맛, 우엉의 짙은 흙향, 익은 당근의 달근한 끝맛, 표고버섯이 품은보송한 나무껍질 향, 모든 것이 자연의 맛이고, 향기였다. 그렇지만 맛으로 먹기엔 뭔가가 부족했고, 배고픔이 느껴질 때 마시지 않으면 삼키기가 싫었다. 야채수프는 한꺼번에 마시지 않고, 하루에 3번을 나눠서 식전에 두 모금씩 마셨다.가끔은 속이 거북해지기도 했는데, 정말 먹기 싫은 날은 한 번만 마시고 다음날로 미뤘다. 매일 마셨지만 특별한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았다.
불편한 점은 있었다. 끓이고 식혀는 과정에서 상하기 쉬웠다. 냉장고에 보관해도 곰팡이가 피거나 금방 상하기 일쑤였다. 그나마 겨울철엔 괜찮았지만, 여름엔 식히다가 상했나 싶을 정도였다. 시큰둥한 향기와 야채가 익은 맛이 뒤엉켜 고소한 맛과는 거리가 멀었다. 끓인 야채수를 보관하는 병을 자주 소독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야채수프는흙을 달여 마시는 걸까 착각이 들 정도로 원초적이었지만, 달라진 건 내 몸이었다.소화가 안되고 변비에탈모까지 온몸은 아픈 갑상선이 영향을 주었지만콜레스테롤 수치는 확실하게 조절해 주었다.내 갑상선을 위한 야채수프는 가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1년 가까이 집 안에서 냄새를 풍겼다.
야채수프는 흙냄새를 풍기며 지친 내 몸에 건강한 반응을 일으켰다.
갑상선 호르몬제가 비어 있는 내 갑상선을 채워주었다면, 야채수프는 내 몸에 들어가 독성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도와준 것 같았다.멍해진뇌에도 좋은 영향을 주는건지, 복잡했던 생각도 정리되었다. 나는 무작정 삶이 틀어진 이유를 망가진 갑상선에게 다 뒤집어씌운 것 같았다.
회사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삶의목표를세워야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몸이 쓰러져서야 지난 일을 후회하는 일 말이다. 보이지 않는 환자복이싫었을 뿐인데,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의 진리를 나만 모르고 살아온 듯 한심했다. 내 것 같지 않은 몸뚱이가 낯설었지만 끝까지 가보지 못한 내 삶. 나는 정말 잘 살고 싶었고, 함께해 줄 가족들과의 일상을 꿈꾸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에 실망한 하기엔 앞으로의 시간이 아쉬웠다. 지금까지 재 정신으로 살지 알았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아픈 것이 정말 끔찍한 것만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