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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SMUSS Nov 11. 2017

폴란드 4]
영하25도, 1살 딸과 아우슈비츠가다

비극의 현장을 비추는 촛불과 꽃...


이번 회는 그 전편들과는 달리 내용이 좀 우울하고...
나만의 느낌도 있지만, 사실이나 평론, 혹은 관련 스토리 위주로 글을 쓴다...
주제가 아우슈비츠니까...



4. 드디어, 아우슈비츠!!!


나는 이번 헝가리 - 폴란드 여행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고, 큰 기대를 한 곳이 아우슈비츠였다. 헝가리는 이전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유럽 최고 중 하나인 부다페스트의 야경(이유는 모르겠으나, 많은 남자들은 여자들과 달리 체코 프라하의 야경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더 좋다고 한다. 사실, 나도 그렇고...)과 맑은 날 강 건너 언덕에서 보는 시내 경치를 와이프와 아이에게 보여 주고 싶었고, 바르샤바에서는 친한 후배와의 만남이 매우 기대되었지만, 사실 나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이번 여행의 초점은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아우슈비츠에 대해 보고, 듣고, 배워왔다. 전공인 기계공학과 경영학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고, 실제 아는 것도 개뿔 없는 나이지만, 역사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은 나는 항상 다른 나라를 여행하기 전에 하다못해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그 나라의 역사를 공부하고 가는데, 폴란드와 헝가리를 여행함에 있어서 나의 관심의 초점은 1-2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대전의 중심에 있던 독일과 폴란드와의 관계, 그 역사의 산물인 아우슈비츠에 대해 큰 관심이 있었다. 사실 굳이 역사를 모르더라도, 만약 축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폴란드와 독일의 국가 대항전은 마치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 혹은 그 이상이라는 것을 다 알 것이다. 이 나라들끼리 축구와 같은 국가 대항 스포츠 시합이 열리게 되면,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가 연출되는데,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역사적인 사건들을 써보면... 


우선, 축구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인 폴란드 대표선수 총살사건이 있다. 심지어,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소개된 이 이야기가 실제 사실인지, 사람들이 만든 허구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어찌 되었던 폴란드인의 분노를 느끼기에는 충분한 이야기이다. 잠시 내용을 참조하자면,

강력한 화력을 앞세워, 단 25일 만에 폴란드 바르샤바까지 입성한 나치는 당시 세계 최강이던 독일 대표팀과 폴란드 간의 축구경기를 개최하여, 축구 실력으로도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며 폴란드 지배를 정당화시키려고 한다. 나라를 빼앗긴 폴란드 사람들은 그들의 안방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자신들의 대표팀이 독일을 꺾기를 바랐으나, 그런 기대와는 달리 폴란드 선수들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다. 그 이유는 경기 시작 전에 독일 장교로부터, 만약 이 경기에서 이길 경우 폴란드 선수 전원 총살형이라는 협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경기는 시작되었고, 원래부터 전력이 강했던 독일 선수들은 전반에만 두 골을 넣으며 폴란드를 압도한다. 그러나 전반전이 끝나갈 무렵, 힘없이 경기하던 폴란드 팀의 한 선수가 골문으로 돌진하여 강력한 만회골을 넣는다. 그의 머릿속엔 '폴란드는 죽음보다 강하다'라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고, 이 선수의 투지는 폴란드 선수 모두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폴란드는 경기 종료 직전 3:2 역전을 하게 된다. 경기장은 함성으로 떠나갈 듯했고, 선수들도 감격에 젖은 얼굴을 하였으나, 그것도 잠시 선수들은 독일군의 총에 맞아 하나둘씩 운동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모두 총살당한 것이다. 


사실, 위의 이야기와는 달리 진짜 역사적 문헌에 남은 총살 경기는 1942년도 우크라이나에서 열린, 디나모 키예프와 독일 공군팀의 축구경기이다. 이날 경기에서 키예프 팀은 독일에 반항하듯, 경기 시작 전 나치식 경례를 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었으며, 엄청난 편파 판정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4:2로 경기를 승리하게 된다. 선수들은 모두 수용소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게 되고, 그중 한 선수는 몇 달후 총살이 되며, 몇 선수는 수용소에 잡혀있다가 반항한다는 이유로 죽고 만다. 이 이야기는 후에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실화이다. (관련 문헌 : http://blog.naver.com/joohoon5/120150321374)


[ 조국을 위해 나치식 경례식를 하지 않은 디나모 키예프 선수들 (오른쪽 흰색)과 실화를 토대로 만든 실베스타 스탤론, 펠레 주연 '승리의 탈출' 포스토, 추모비, 실제 선수들 (오른쪽 흑백)과 영화 사진 (구글 사진 참조) ] 



이러한 일화 말고도, 전쟁이라는 역사 속에 태어난 시대적 아픔도 큰 이야깃거리가 된다. 바로, 독일의 국가대표 축구선수 루카스 포돌스키의 이야기이다. 독일의 간판 스트라이커인 클로제와 같이 폴란드 출신 (출신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축구선수이고, 어머니가 핸드볼 선수라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많음)이며, 유난히 클럽팀에서보다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이 커서, 우리나라에서는 '국대스키'라는 별명을 가진 선수이다. 국가대표로 100 경기가 훨씬 넘는 경기를 나섰기에, 당연히 모국 폴란드와의 경기도 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포돌스키의 표정을 난 잊을 수 없다. 특히, 유로 2008에서 하필 폴란드를 만나 독일이 2-0으로 승리를 한 그 경기에서, 포돌스키는 독일의 두 골을 모두 넣는 등 만점 활약을 하게 된다. 또, 하필 첫 골의 어시스트는 클로제였고, 두 번째 골 역시 클로제가 헛발질한 것을 포돌스키가 넣는 상황이 된다. 물론, 포돌스키는 두 골을 넣고 나서 전혀 세리모니를 하지 않았고, 기뻐하는 동료들 속에서도 단 한 번의 미소도 짓지 못한다. 그리고, 승리 후 인터뷰에서도 마치 약팀에게 어처구니없이 진 이후에 하는 반성 모드의 인터뷰처럼, 고개를 푸욱 숙인 채 울먹이며 승리 인터뷰를 했는데, 난 아직도 그 모습이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이 모든 게 역사의 슬픔 아니겠는가...   


[ 골을 넣은 선수가 아닌 자살골을 넣은 선수처럼...골을 넣고도 괴로워하는 포돌스키. 그리고, 참담한 인터뷰  ]



다시 폴란드 역사로 돌아와서...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하는 1918년까지도 수난의 역사가 이어졌던 폴란드...그러나,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는 독일과 러시아에 의해 분할 점령되고 만다. 이때 독일에 점령당한 지역에 생긴 수용소가 아우슈비츠이다. 우리나라의 독립군과 마찬가지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폴란드 독립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해인 1944년에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무려 2달 간의 항전 끝에 거의 모두 전사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무고한 바르샤바 시민 20여만 명이 죽게 되어, 두 나라는 철천지 원수가 되었고, 이게 바로 폴란드 축구 대표팀이 독일에 졌을 때, 모든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누워, 경기장을 못 떠나고 눈물을 흘리는 원인이다.  


“소금광산이나 가지, 왜 어린아이를 데리고 그 참혹한 역사의 장소인 아우슈비츠를 가? 거기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 아직도 이승을 떠도는 귀신이 있을 걸...”이라며 나를 말리던 후배를 무시하고, 아우슈비츠를 가게 된 데에는 어려서 본 몇 편의 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도 한몫을 했다. 이 중,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영화라고 생각되는 “쉰들러 리스트”와 오래된 영화라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를 수도 있는 “새벽의 7인”, 그리고 웃음과 감동의 눈물을 준 “인생은 아름다워” 등은 단순히 좋은 영화를 넘어, 전쟁이라는 상황을 통해 우리 같은 후세들에게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위의 세 영화는 각기 다른 장소의 각기 다른 스토리를 갖는 영화들이다. 가장 오래된 “새벽의 7인”은 1975년에 만들어진 영화이며, 사실 그 배경이 체코이다. 독일인 점령군 사령관이자, 체코에 부임하자마자 300명을 처형하는 등, 잔인하기로 유명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라는 게슈타포 출신의 히틀러 부하를 암살하는 영화인데, 나는 이 영화를 초등학교 시절 지금은 추억이 된 “주말의 명화” (아마 나이 어린 분들은 잘 모르겠으나, 지금처럼 컴퓨터로 쉽게 영화를 다운로드하여 볼 수 없었던 예전에는, 마치 요즘 유명한 드라마의 본방을 사수하는 것처럼 우리를 기다리게 한 영화 상영 프로였다)를 통해 봤다. 당시에는 몰랐던 전쟁의 참혹상과 나의 피를 끓게 했던 암살 팀원의 배신, 마지막 성당 지하에서의 사투 끝에 서로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장면에서 펑펑 울었던 그때가 아직도 내 머리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옛 생각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 영화는 197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인 단성사 (지금은 없어진 종로의 대표 극장, 나는 여기서 서편제와 남부군, 다이하드와 에이리언, 터미네이터를 보았다)에서 상영되었는데, 처음에는 유명 배우가 나오지 않아서 흥행이 안되다가, 영화를 본 남성들의 절대적 지지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관객이 늘어나, 그 당시에 무려 40만 명이 본 대 히트작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남자들의 용기와 의리, 가족을 위해 그들을 배신할 수밖에 없는 남자의 실제 이야기를 느끼기 위해 실제 주인공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메서디우스 성당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니, 영화를 본 분들은 한번 들러 보길 추천한다. 


[실제 단성사 포스터와 VHS Video 표지, 실제 성당의 벽 (총알 자국과 물로 익사시키기 위해 사용된 환기구)]

[가장 슬픈 장면. 지하에 물이 차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닫고, 마지막 총알로 서로를 쏘는 눈물의 장면]  

[‘프라하의 도살자’, ‘피에 젖은 사형집행인’ 등의 별명을 지닌 악명 높은 하이드리히...이 놈 암살이 영화 내용]

[암살 당시 차와, 성당에 물을 넣는 실제 역사 사진 (흑백) vs. 영화의 사진 (컬러), 그리고 실제 7인의 전사(하)]



아참, 바로 얼마 전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우연히 친구의 교수님 (예순이 훨씬 넘으신)과 동석하게 되었다. 늦게까지 술을 먹다가, 내가 이 영화를 얘기하자 갑자기 나의 손을 꼬옥 잡고..."이 영화를 얘기하는 젊은이를 여기서 만나다니..." 하시며, 기쁨과 함께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셨다. 본인은 내가 아까 말한 그 단성사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본 사나이이며, 이 영화가 본인의 인생영화이고, 그 때문에 전혀 이 영화에 관심 없는 자신의 아들을 위협하여, 억지로 이 영화를 자신과 몇 번이나 같이 보게 했다고 하셨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아들과의 사이는 멀어졌고, 아직도 아들은 이 영화를 매우 싫어하게 되었으나, 자신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교수라는 자리에서도 이 영화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해왔으며, 실제 이 영화의 배경인 체코의 메서디우스 성당에도 가보셨다고 하셨다. 포탈을 통해 검색해 보니, 정말 새벽의 7인으로 인해 배경이 된 이 성당을 찾는 사람이 꽤 되었다. 체코를 3번이나 갔는데, 그리고 이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여기를 안 가보다니... 다음엔 꼭 찾아가 봐야지...        

실제 영화의 배경이 된 성당 (체코 프라하)



갑자기 이야기가 영화로 빠졌지만...이왕 한 김에 조금만 더 영화 이야기를 하자면...“인생은 아름다워”는 두 영화와는 달리 실화가 아닌 그냥 픽션이며, 이야기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로 끌려가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유태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아들을 위해 자진해서 수용소로 들어오는 어머니의 이야기인데,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영화 역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1939년에 시작되며, 전쟁이 종료되는 1945년까지 이어진다. 수용소에 같이 끌려온 아들을 위해, 무자비한 수용소 생활을 전쟁게임이라고 속이며, 1000점을 따면 우승자에게 진짜 탱크를 준다고 하여 아들을 안심시키고, 자신이 죽으러 가는 그 순간까지도 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웃음을 주는 아버지의 모습과 그 뒤에 이어지는 기관총 소리는 실화 이상의 감동을 준다. 처음 봤을 때는 중간중간에 나오는 코믹스러운 장면 때문에 웃기도 하지만, 내용을 다 알고 다시 한번 보면, 그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영화 끝까지 계속 울게 되는 영화이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 영화인 "인생은 아름다워"...깊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은 분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 아들을 위해 전쟁놀이를 가장한 채 사형을 당하러 가는 아버지의 모습...정말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난다. ]



마지막으로, 내가 바로 가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한 쉰들러 리스트는, 아마 위의 두 영화보다 본 사람들이 많고, 보지 않았더라도 내용을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독일에서 폴란드로 온 쉰들러와 그를 도와 유태인이 운영하던 그릇 공장의 사업을 돕는 유태인 스턴, 그리고 아우슈비츠에 와서 유태인을 마구 죽이는 독일인 괴트가 중심을 이룬다. 돈만 밝히던 쉰들러가 자신의 조국 독일군의 무자비한 살육과 반인륜적 행위를 보고, 전 재산을 털어 유태인을 살리려는 노력을 하고, 실제 아우슈비츠에서 무려 1,100명의 유태인을 탈출시킨 이야기이다. 실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이 죽인 유태인은 약 600만 명인데, 유럽 전체에 살던 유태인이 총 1,100만 명인 것을 생각하면, 전체 유태인의 반 이상이 죽은 것이며, 아우슈비츠에서만 최소 100만 명에서 250만 명이 가스실에서, 또는 총살로 죽었고,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난 유태인은 불과 4,000명 밖에 안된다. 그중 1,100명이나 탈출시킨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되며, 돈만 밝히던 사람이 점차 변하는 모습에 감동을 느낌과 동시에 수백만 명의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사건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이렇게 인류 역사상 잊을 수 없는,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가진 아우슈비츠에 우리 세 가족은 가게 된다. 그러나, 소금광산에서 우리가 계단 수를 잘 몰랐던 것처럼, 실제 온도 영하 18도에, 우박과 같이 큰 싸라기눈이 오는, 체감온도 영하 25도에 아우슈비츠를 가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우리는 몰랐다.   

아우슈비츠 Day tour에는 궂은 날씨에도 수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Tour 바로 전날인 어젯밤에 우리가 원하는 시간으로 표를 쉽게 산 것이 운이 좋았다고도 생각된다. 이렇게,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처럼, 그리고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의 군대가 전장을 향해 이동하듯, 수십 대의 버스가 바로 한 곳, 아우슈비츠 수용소 1에 모였다. 아우슈비츠에는 총 3개의 수용소가 있다. 원래, 폴란드 명칭으로 오슈비엥침이라는 곳이 나치가 점령을 하며 아우슈비츠로 개명되었고, 그 후 수용소를 확장하면서, 제 2 수용소인 비르케나우와 제 3 수용소인 모노비츠가 생겼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는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폴란드 국회가 박물관으로 조성을 하였고,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우리가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봐서 익숙한 곳이 바로 우리가 도착한 제 1 수용소이다.   


강한 눈발이 날리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입구에 도착하면, 많이 본 듯한 철문과 문구가 보인다. “ARBEIT MACHT FREI (일하면 자유로워 진다)”라는 나치의 슬로건이다. 사실, 이 곳에서는 일하기는커녕, 기차 타고 오자마자 가스실로 가서 죽은 사람이 셀 수 없이 많다. 유명한 사진처럼, 오자마자 오른쪽, 왼쪽으로 사람을 나누어 그중 한쪽은 그대로 가스실행으로 가는...정말 끔찍한 일이 생긴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이 곳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삶을 연장하는 유일한 방법이지 않았나, 그런 의미에서는 맞는 말일 수도 있다는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생각도 든다. 다만, 나와 같이 처음 이곳에 도착하여, 이 문을 지났던 유태인들은 이 문구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마 그 상황에서는 문구가 머리에 안 들어왔겠지만...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시, 정말 속된 말로 싸대기를 강타하는 눈발로 인해, 다후는 걸을 수 있는 자유마저 빼앗긴 채, 유모차로 옮겨졌다. 다행히, 거의 매일 비가 오는 런던에서 가져온 비닐 커버 덕에 눈바람을 막을 수는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다후와의 아우슈비츠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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