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이자 아빠이고, 아빠이자 엄마인 삶
유해한 배우자의 정체를 처음 알고 충격과 혼란, 무력감과 좌절, 분노와 슬픔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던 시절, 나는 거의 매일 글을 썼다. 믿을만한 지인과 친구 몇 명에게만 보이는 글. 그 안에는 내가 겪은 일들, 유해한 배우자의 언행 하나하나, 그리고 그 결과 만신창이가 된 내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스크롤 압박이 어마무시할 만큼 장황하게 쏟아놓은 고통의 비명이었다.
그러기를 어언 1년 반. 200개 정도의 글을 쏟아 놓았다. 때로는 푸념, 때로는 포기, 때로는 절망, 때로는 극도의 분노와 미움. 3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그런 글을 쓰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는 내 글을 읽고, 매번 위로와 격려, 울분과 기도로 함께해 준 고마운 이들에게 가끔 근황을 알려주기 위해 제한공개로 글을 올릴 뿐이다.
3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유해한 배우자에게서 심리적으로 완전히 독립했다. 매주 꼬박꼬박 상담도 받았다. 아이들 역시 상담과 심리치료를 꾸준히 받고 있다. 글을 쓰며 좋은 이들을 만났다. 위험해 보이기만 하던 세상에 발을 내딛자, '안전한 관계'가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고 말로 그려주는 선한 이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 속에서 받아 누린 안정감은 나를 서서히, 그러나 빠르게 치유해 주었다.
그럼에도 종종, 외딴섬의 컴컴한 동굴에 알몸으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소일거리 알바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차려 먹인 날. 쌓여있는 설거지 앞에 잠시 누워 쉬면서도 내가 쉰다고 해서 같이 쉬어주지는 않는 시계를 바라보며 원망이 올라오는 날. 씻고 자려고 누웠는데, "엄마 목말라." "엄마 다리가 간지러워."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는 날.
"아, 오늘 하루 진짜 길었어. 저녁 먹다가 무슨 일이 있었냐면..."이라고 재잘재잘 떠들 대상이 없다는 걸 피부로 느끼는 날. 상담을 받고 와서도 기운이 없어 보이는 아이의 방문이 잠겨있는 걸 보고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어떤 것 같아?"라고 물으며 위로받을 사람이 없다는 공허감이 벽처럼 다가오는 날. "기분 꿀꿀한데 재밌는 거나 볼까? 맛있는 거 사다 놓고?" 하며 하루 정도 딩가딩가 허랑방탕 범죄에 동참할 동반자가 없음을 느끼는 날.
대신, 지칠 대로 지쳐 누운 나에게 다가와 사소한 일로 시비를 거는 유해한 배우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날. 예정된 생활비가 약속된 날에 입금되지 않아 통장 잔고 확인하기를 수시로 반복해야 하는 날. 3년 전, 4년 전 일에 왜곡과 망상의 옷을 잔뜩 입혀 들고 와 내 뒤통수에 던지는 그에게 무반응으로 일관해야 하는 날.
지쳤기에 지쳤다고 티 낼 수 없고. 힘들기에 힘들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날. 그게 '평범한 일상'인 삶.
그런 날들을 이겨내고 버텨내고 살아내다가 문득문득 멈춰 선다. 밀려오는 지침을 소화하느라. 쌓이고 쌓인 힘듦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조용히 쏟아 내느라.
자웅동체의 삶은 그렇게 고독하다.
자웅동체는 주로 이동 능력이 낮거나, 짝을 찾기 어려운 생물에게 유리한 방식의 생존법이라고 한다. 짝을 만나지 못해 번식하지 못할 실패의 위험을 줄이고, 에너지 효율성이 높으며, 희소 환경에서도 종을 유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유해한 배우자와의 삶도 마찬가지다. 법적으로 기혼이나 실질적으로 싱글인 이들의 유일한 생존법은 정서적 자웅동체가 되는 것이다. 상대 배우자가 응당 해야 할 역할을 기대하다가 실망하고, 오히려 착취당하는 것보다 에너지 효율성이 높기 때문이다. 학대자와 함께하는 생활 속에서도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은 원래 자웅동체로 살아갈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롯이 홀로 된 존재로 살아가고 싶다. 역기능으로 충만한 존재와 한 공간에서 살아가며 그 흔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 삶을 그만하고 싶다. 그 언행이 남긴 자취를 해독하느라 세 배, 네 배의 에너지를 쓰는 일도 멈추고 싶다. 그 에너지로 나에게 더 다정하고 싶고, 그 에너지로 아이들과 더 자유롭고 싶다.
그렇게, 독립의 마음에 점점 더 가까워져 가나보다.
자웅동체로 살아가는 인간은 고독하다. 하지만, 기꺼이 홀로 되기를 선택한 인간은 아름답다.
#겨자풀식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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