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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스트잇 MUST IT Mar 13. 2018

All about this Designer

살아있는 전설, 칼 라거펠트



주름이 자글자글한 외모, 언제나 블랙 수트에 선글라스를 끼고서 하얗게 물들인 포니테일 머리를 하고 다니는 강박증 환자. 더 끔찍한 것은 자신의 안락한 집을 20만 권의 책으로 뒤덮어버린 독서광. 상상만 해도 엄청난 고집쟁이에 고지식한 늙은이 같은 이미지다.


그러나 이런 강박증에 편집증 환자가 세상의 중심에서 트렌드를 만들고 전설이라 불린다. 강박증 같은 패션 또한 그의 상징이다. 패션을 모르는 사람이라도"어! 이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얘기할 디자이너는 샤넬의 영원한 수장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이다.


칼 라거펠트와 반려묘 '슈페트'   <출처 : nymag >




1. 당신은 내가 브라를 벗어달라고 하면 벗을 건가요?




검은색 터틀넥과 연한 청바지가 스티븐 잡스를 떠올리게 하듯이, 하얀색 포니테일과 선글라스가 없는 칼 라거펠트는 상상할 수 없다. 특히 선글라스는 그에게 속옷과 같다. 언젠가 한 번은 칼 라거펠트에게 무례하다며 선글라스를 벗으라는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내가 브라를 벗어달라고 하면 벗을 건가요?"


그에게 있어서 선글라스는 신체의 일부이다. 그리고 상징이었다.



언제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닌다    <출처 : fansshare >



이런 고집적이고 상징적인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감각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영재였다. 1938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연유 사업으로 성공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그는 또래 아이들과 다르게 어릴 때부터 예술과 패션에 관심이 많은 공상가였다. 그의 부모님은 천부적인 드로잉 감각을 눈치채고,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파리 예술 학교에 유학을 보냈다. 그는 16살이 되던 해에 파리 국제 양모 사무국 주최의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여성용 코트 부분 1위를 차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당시 콘테스트에는 이브 생로랑과 같은 쟁쟁한 경쟁자가 많았다고 한다.


쟁쟁한 경쟁자 속에서 16살 어린 나이에 당당히 1등을 차지하고, 디자이너 발망의 오뛰쿠튀르 부티크에 스카우트되었다. 발망에서 라거펠트는 몇 년 동안 어시스트로 일하면서 실력을 길렀고, 그 뒤로는 장 파투의 부티크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그는 일에 점점 흥미를 잃고, 장 파투의 부티크에서 1960년에 나오게 되었다.



 장 파투 부티크에서 일하던 사진이다   <출처 : livejournal >




2. 내 생애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는 최고급 디자인만을 지향하는 오튀쿠튀르 부티크에서 나와, 프리랜서로 전 세계 다양한 브랜드의 디자인을 제작했다. 프리랜서로 활동한지 약 5년이 지날 때쯤, 그는 끌로에의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영입되었다. 그가 디자인한 액세서리는 감각적이며 트렌디하였고, 끌로에는 그 재능을 액세서리에만 활용하기 아깝다고 생각하여 그를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하였다.


그는 끌로에를 성공적으로 성장시켰고, 72년에 패션 미디어 헤드라인에 끌로에를 장식시키며 칼 라거펠트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끌로에의 여성스러움과 로맨티시즘을 극대화시켰고, 케이프와 실크 드레스와 같은 끌로에 시그니처 상품을 디자인하였다. 끌로에의 눈부신 성장을 도와준 칼 라거펠트는 지금까지도 끌로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좌)끌로에 케이프 망토와 (우)실크드레스     <출처 : 끌로에>



특이한 점은 칼 라거펠트는 끌로에의 수석 디자이너를 맡으면서, 동시에 펜디의 수석 디자이너를 맡았다는 것이다. 그는 펜디에서 더 눈부신 활약을 펼쳤는데, 그중 하나가 펜디의 로고를 탄생시킨 것이다. "Fun Fur"의 약자인 'FF'를 사용하여 로고를 만들고, 가방과 벨트 같은 악세서리에 활용하였다. 그가 만든 로고는 지금까지 활용되며, 펜디의 상징이 되었다.



펜디 로고 FF    <출처 : RBA>



펜디에서 또 하나의 업적은 모피의 혁신이다. 펜디는 본래 모피 가게였는데, 칼 라거펠트가 수석 디자이너를 맡은 이후로 모피에 주름을 잡고, 조각을 내서 이어 붙이는 등의 재해석된 모피를 세상에 선보였다. 또한 실크, 울 과 같은 다양한 소재를 모피와 혼합하여 사용하면서 모피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이후에 많은 모피 상품들을 매년 품절시키며 지금까지도 펜디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겸하고 있다.



재해석된 모피 디자인     <출처 : GRAZIA>




3. 코코 샤넬이 살아돌아왔다?




칼 라거펠트를 말하는데 있어서 수식어처럼 붙는 브랜드가 있다. 바로 '샤넬'이다. 지금의 샤넬을 만든 장본인이자, 샤넬 그 자체이다. 1982년에 칼 라거펠트가 샤넬에 영입되기 이전에 샤넬은 코코 샤넬이 죽은 이후로 진부한 브랜드로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도약을 위하여 칼 라거펠트를 영입했다.


무려 그 시절 연봉 100만 달러에. 


그러나 영입 당시에, 고결한(?) 프랑스 브랜드에 독일인 풋내기 디자이너가 수석 디자이너로 온다는 말에 거센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샤넬의 생존을 위해 칼 라거펠트를 영입했고 혁신을 일으켰다.


샤넬의 첫 오뛰쿠튀르에서 피날레때 박수갈채를 받았다.    <출처 : VOGUE>



그의 첫 번째 샤넬 오튀쿠튀르가 열렀던 날, 기자들은 감탄을 연발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죽은 코코 샤넬이 환생했다고.



그는 샤넬의 진부했던 디자인을 버리고 근본만 남겨놓고서, 트렌디하고 문화적인 옷을 입혔다. 또한 사람들에게 다시 샤넬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샤넬의 근본을 과장시키고 확대시키며, 젊은 세대들이 열광할 수 있는 대중적인 디자인을 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 장인 공방을 통하여 오직 샤넬만을 위한 소재들을 제작 함으로서 품위를 유지하였다.



샤넬의 2017 오뛰쿠튀르     <출처 : ELLE/ALLURE>



칼 라거펠트가 지금까지 디자인한 샤넬은 마치 코코 샤넬을 위해 헌정하는 컬렉션들 같다. 코코 샤넬의 근본적인 디자인을 지금까지 유지하면서, 그 위에 트렌디 함이라는 옷만 덧입혔다. 우아함 그 자체를 표현하듯 과장되고 화려하며, 아름답다. 이번 2018 S/S 오튀쿠튀르를 살펴만 봐도 트위드 소재 그리고 과거의 코코 샤넬의 추구했던 여성성의 고귀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부자재와 색상, 연출에 있어서 어느 하나 과거에 머문 것이 없고, 오히려 패션을 앞서간다.

샤넬의 2018 SS 오뛰쿠튀르     <출처 : VOGUE>



칼 라거펠트의 샤넬에서 흥미로운 것은 컬렉션 방식이다. 샤넬은 흔한 브랜드처럼 단순한 패션쇼를 하지 않았다. 공항, 카지노, 크루즈 그리고 쇼핑센터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상상 이상의 연출을 선보이며 샤넬의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회전목마를 타거나, 공항에서 체크인을 하는 등의 일상생활 속에서 샤넬을 선보이며, '샤넬은 패션이 아닌 스타일이다'를 전달하고 있다. 2015년에 열렸던 F/W 오튀퀴튀르에서는 카지노 분위기를 연출하며 지드래곤을 초청하며 우리나라에서 화제가 되었었다.



샤넬의 2009 오뛰쿠튀르    <출처 : pinimg>



샤넬의 2015 오뛰쿠튀르    <출처 : themalaymailonline>



칼 라거펠트는 샤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패션이 영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래 가는 건 스타일이다. 하지만 스타일보다 더 오래 지속되려면 역시나 패션을 따라야 하는 법이다."





4. 내가 아는 단 하나의 역할극. 그것은 바로 나.



칼 라거펠트는 자신의 존재를 '브랜드'라 말한다. 자신의 브랜드 '칼 라거펠트' 이외에 수많은 브랜드에서 수장을 맡고 있지만 각각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다중인격처럼 너무 다르다.

어느 모습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이런 모습은 수 많은 책들에서 나온다고 직접 말했는데, 그는 각 나라에 위치한 자신의 집을 20만권의 책으로 도배한 독서광이다. 그러면서 그는 책에서 많은 영감이 나오며 생각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칼 라거펠트의 실제 서재이다    <출처 : smart people>



그는 디자인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모습을 비추었다. 모델, 성우, 아나운서 등의 분야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었으며, 자신이 잡지에 찍힌 사진이 맘에 들지 않아서 직접 사진을 공부해 포토그래퍼로도 활동 중이다. 그리고 그는 성공적인 다이어터인데, 사실 그는 엄청난 거구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연인(?)인 에디 슬리먼이 디자인한 디올 수트를 입기 위해서 13개월 만에 40kg을 빼며 연인과의 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좌)비포 와 (우)애프터    <출처 : Nine / Glamour>



칼 라거펠트의 수식어는 너무 많아서 다 부르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의 어록을 통해 그를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늘 내가 이렇게 살게 되리란 걸. 그리하여 하나의 전설이 되리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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