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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스트잇 MUST IT Mar 20. 2018

All about this Designer

별이 지다, 위베르 드 지방시



작년부터 유난히도 많은 별들이 지고 있다. 지난 3월 10일, 패션계의 거장 위베르 드 지방시가 91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수면을 취하다가, 영원히 잠들었다. 세련됨, 우아함의 상징이었던 지방시 다운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출처 : Los Angeles Times>



브랜드 ‘지방시’를 만든 그에게는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의 수식어를 되짚어보며, 그의 생애를 되돌아보자.




1. 사랑과 우정 사이,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은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이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지방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만남은 1954년에 시작되었다. 1954년에 지방시는 부티크를 운영하고 있었고, 어느 날 자신에게 옷을 맞추고 싶다는 미스 헵번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지방시는 당시 스타였던 캐서린 헵번이 온다는 생각에 설레고 있었으나, 약속 당일 지방시를 맞이한 것은 촌스러운 10대 신인 여배우였다. 그 촌스러운 10대 소녀가 바로 오드리 헵번이다.



어린시절의 오드리 헵번    <출처 : alostouramagazine>



캐서린 헵번을 기대했던 지방시는 매우 실망하고, 컬렉션 준비로 바쁘기 때문에 오드리 헵번에게 옷을 맞춰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오드리 헵번은 지방시의 옷을 꼭 영화 의상으로 입고 싶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지난 시즌의 드레스라도 보여 줄 수 없을까요? 그중 제가 원하는 드레스를 고르겠습니다”


위베르 드 지방시는 알겠다며 전 시즌의 드레스를 보여주었고, 오드리 헵번은 그중 3벌의 옷을 고르며 지방시 앞에서 입어 보았다. 놀라운 것은 지난 컬렉션의 드레스들은 마치 오드리 헵번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딱 맞았고, 오드리 헵번을 빛나게 만들었다.



오드리 헵번이 직접 고른 드레스 3벌    <출처 : 101FASHIONtips>


오드리 헵번은 그렇게 3벌의 옷을 영화 <사브리나>에 입고 나가서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했다. 50년대에는 마릴린 먼로와 같은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던 시대였는데, 키 크고 깡마른 오드리 헵번과는 먼 얘기였다. 그러나 그녀가 영화<사브리나>에서 지방시의 옷을 입고 나온 뒤, 시대의 여성상이 바뀌기 시작했고 카프리 팬츠와 보트넥 티셔츠와 같은 스타일을 한 번에 유행시켰다.



(좌)마릴린 먼로와 (우)오드리 헵번   <출처 : wikimedia>



영화<사브리나>이후에 오드리 헵번은 영화 계약할 때마다 조건에 지방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조건을 추가하며 둘의 각별한 사이를 보여주었고, 총 8편의 영화를 함께했다. 그중 오드리 헵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로마의 휴일>도 포함되어 있다.



<로마의 휴일>에서의 오드리 헵번    <출처 : firstonline>




오드리 헵번과 지방시는 연인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진한 우정을 과시했다. 항상 붙어 다니며 서로에게 조언을 구했고, 두 사람은 스케줄이 있더라도 각자의 영화제와 컬렉션에 참석해주며 서로를 응원했다. 또한 지방시는 그녀를 위해 ‘랑테르니’라는 이름의 향수를 제작했는데, 오드리 헵번 이외에 아무도 쓸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닌 ‘금지’라는 단어를 의미한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고, 둘은 결국 약혼까지 했었으나 서로의 우정과 관계를 위하여 결혼식을 취소했다고 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영원히 함께 했다. 안타깝게도 1992년에 오드리 헵번이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는데, 죽기 직전까지 지방시를 안고 있었으며 지방시는 그녀가 입었던 옷들에 파묻혀 오열했다고 한다.




<출처 : Patrick Humphreys>


평생을 함께 하며 사랑과 우정의 경계를 넘나들던 그들은, 서로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지방시와 오드리 헵번이 없었을 것이다. 오드리 헵번은 가끔 지방시에게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고마워요 위베르, 사랑해요”




2. 발렌시아가의 유일한 수제자, 지방시



50년대의 디자이너들은 오뛰퀴튀르를 운영하며,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디자인과 패턴을 숨기기에 바빴다. (물론 요즘도 그렇다.) 그런데 발렌시아가와 지방시의 관계는 서로의 디자인을 공유하고 수석 패턴사를 빌려줄 만큼 깊은 관계였다.



자신의 부티크에서 디자인 중인 위베르 드 지방시    <출처 : TA Shroud of Thoughts>



위베르 드 지방시는 10살 때, 디자이너들의 화려한 오뛰퀴튀르를 보고서 패션의 세계에 들어섰다. 또한 VOGUE에 나오는 의상들을 그리는 것이 취미였는데, 그때부터 발렌시아가의 의상을 유독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 지방시는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던 도중에,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들고 무작정 발렌시아가를 찾아갔다. 발렌시아가는 그의 포트폴리오를 보고서, 지방시의 감각을 인정했다. 그러나 아직 학생이고 경력이 없어서 같이 일할 수 없다고 했고, 지방시는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다른 부티크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디자인이 비슷한 (좌)발렌시아가 와 (우)지방시    <출처 : vanityfai>



지방시는 성장하며 심플함, 절제미, 우아함 등의 발렌시아가의 특징을 점점 닮아갔다. 그리고 63년에 VOGUE는 그들을 ‘지나친 낭비를 요하지 않는 명석한 대단함’이라고 칭송했다. 지방시는 발렌시아가와 유사한 디자인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철학은 둘 모두를 최고의 디자이너로 만들어주었다.


“여성들의 몸매가 뚱뚱하든 말랐든 상관없다. 내 옷이 그녀들을 멋지게 보이도록 만들어 줄 테니까”



<출처 : VOGUE>




3. 우아함 그 이상의 우아함, 지방시 스타일




지방시는 어렸을 때부터 미적 감각이 남달랐다. 패션디자이너로 진로를 정한 후에 그는 파리 에콜 데 보자르(파리 국립미술고등학교)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하고 오뛰퀴튀르 부티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뤼이생 를롱, 엘사 스키아파델리 등의 부티크에서 일하며 실력을 쌓았고 1951년에 자신의 부티크를 오픈했다.




지방시의 첫 오뛰퀴튀르 부티크    <출처 : GIVENCY>



그러나 그는 재정적인 문제로 오뛰퀴튀르 컬렉션에 사용할 비싼 원단을 구입할 수 없었다. 지방시는 대신에 남성 와이셔츠에 쓰이던 값 싼 원단을 사용하여 컬렉션을 준비하며 새로운 디자인에 도전하였다.


당시 오뛰퀴튀르에 올라오는 옷들은 드레스처럼 하나로 이루어진 의상들이었으나, 지방시는 스커트나 블라우스처럼 단품으로 된 옷을 선보이며 도전을 감행했다.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지방시의 첫 컬렉션   <출처 : glamourdaze>




컬렉션 한 번에 지방시는 화제에 오르고, 베스트셀러 아이템을 탄생시켰다. 그가 첫 번째 컬렉션을 선보이며 탄생시킨 베스트셀러 아이템은 ’베티나 블라우스’인데, 당시 유명한 모델이었던 ‘베티나 그라지아니’가 입고 컬렉션에 서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베티나 블라우스’는 저렴한 하얀색 면 원단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러플 장식과 네크라인 디테일에서 우아함을 느낄 수 있었고 값싼 원단이란 느낌을 전혀 주지 못했다.




지방시의 베티나 블라우스    <출처 : Emaze>



그의 디자인은 화려한 장식보다는 심플하고 깨끗한 이미지에 중점을 두었고, 실루엣 또한 군더더기가 없었다. 절제미와 라인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지방시의 디자인은 발렌시아가와 비슷한 점이 많았고, 그 부분에서 둘의 관계가 사제 및 친구관계로 발전한 것 같다.


그러나 발렌시아가와 다른 부분도 있었다. 지방시는  화려한 색상을 많이 사용하여 색상의 조화와 대비를 중요시 여겼고, 절제됐지만 화려한 여성성을 강조하였다.



자신이 만들었던 의상 앞에서 사진을 찍은 지방시    <출처 : tmgrup>



그가 만들었던 옷은 모든 여성들에게 잘 어울렸기 때문에 평생 고객이 되는 여성들이 많았다. 또한 그녀들은 지방시를 사모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드리 헵번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이 눈에 안 들어왔을 것이다. 패션계의 큰 별이 졌지만, 그는 우리에게 ‘지방시’와 뮤즈'오드리 헵번'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오드리 헵번이 지방시에게 선사했던 산문시를 보며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자 한다.


그의 우정이라는 이름의 뿌리는 깊고 튼튼하다.

그의 애정이라는 이름의 가지는 단단하여 그가 사랑하는 이들의 안식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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