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낭만, 그 사이의 견고한 트렌치코트
날카로운 바람은 갔다. 어느샌가 봄이다. 마음마저 생경한 봄에는 코트 자락을 나부끼며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다.
그럴 때에는 트렌치코트가 제격이다.
클래식하다는 수식어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아이템이 또 있을까? 반듯하게 각이 살아있는 어깨선의 견장과 군더더기 없이 툭 떨어지는 실루엣, 느슨하고 태연하게 묶은 허리끈, 걷는 걸음마다 바스락대는 소리마저 좋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것이 나오고 또 사라지는 세상이지만, 없어지지 않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올드해 보이거나 하지는 않을까' 하고 넘겨짚을 필요는 없다. 누가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취향이 고스란히 녹아들 테니까. 좋은 트렌치코트 한 벌만 고른다면 오래도록 잘 입을 수 있다.
트렌치코트의 '트렌치(trench)'는 말 그대로 '참호'라는 뜻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병사가 참호 안에서 입었던 것이 시초가 되었다. 지금이야 단순한 디테일로 여겨지는 장식들이 사실은 당시 병사들의 생존을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면 믿겠는가?
수류탄, 탄약통 등의 장비와 견장을 달 수 있도록 어깨에 부착된 D자형 고리나 비바람을 막기 위한 스톰 플랩, 바람의 방향에 따라 다르게 여밀 수 있는 이중 여밈, 커프스 플랩 등이 현재에도 남아있는 제복적인 요소이다.
트렌치코트에 주로 쓰이는 개버딘 소재 역시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직물이다. 이전에도 물론 비슷한 오버코트가 있었지만 무겁고 기능성이 떨어지는 탓에 되레 군인들을 힘들게 했다.
하지만 토마스 버버리가 만들어 낸 개버딘은 비바람에도 끄떡없고 추위에도 거뜬히 견딜 수 있는 기능성 신소재로, 이것으로 만든 트렌치코트가 영국군의 군복으로 채택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트렌치코트는 버버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전쟁 중에 군복으로 입었던 트렌치코트는 왜 지속해서 대중에게 입혀진 것일까?
영화 속의 의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시대의 무드를 면면히, 또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
단순한 군복에 지나지 않았던 트렌치코트가 대중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받도록 이끈 것은 다름 아닌 그 시대 스크린 속 배우들의 영향이 지대하다. 로버트 테일러나 험프리 보가트, 알랭 들롱 같은 배우들은 영화를 기제로 하여 트렌치코트 위에 낭만을 입혔다.
영화 <애수> 속, 비 내리는 워털루 다리 위의 로버트 테일러는 회상에 젖는다. 옛 여인을 그리워한다. 나지막한 재즈 선율이 흐르는 카페의 험프리 보가트는 잔을 들고 말한다. "그대 눈동자에 건배를(Here’s looking at you, kid)."
<애수>의 남자는 떠나고, <카사블랑카>의 남자는 여자를 떠나 보낸다.
두 남자 모두 트렌치코트를 입었다.
그 뿐인가. <한밤의 암살자>의 알랭 드롱도,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권총을 든 <영웅본색>의 주윤발도 있다. 트렌치코트 자락을 휘날리는 그 시대의 고독한 영웅의 모습이 하나의 상징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후로 전통적인 트렌치코트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게 된다. 마치 반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더블브레스트에 넉넉한 품, 무릎 즈음으로 오는 기장이 대표적인 이미지였다면 이제는 본연의 색을 유지한 채 실루엣이나 소재, 디테일의 변주를 주어 아주 신선한 존재감을 펼쳐냈다.
그때 그 시절 입었을 법한 버버리의 기본형 트렌치코트. 일명 '바바리'라고도 부른다.
기본기가 탄탄한 옷은 얼핏 단순하게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생각만큼 간단하지는 않다. 자체만으로 충실하게 입을 수 있다. 어떤 옷과 걸쳐도 어색함이 없다. 투박한 개버딘 소재에 묵직한 더블브레스트 여밈, 어깨 견장과 건 플랩 등의 디테일을 온전히 살렸고, 넉넉함과 여유로움도 갖추었다. 허리끈 질끈 동여매고 가벼운 봄바람을 맞고 싶다.
유려한 트렌치코트 두 벌을 이어 결합해 만든 것처럼 보이는 셀린의 트렌치코트.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는 아니다.
어깨 부분을 과감하게 잘라내고 슬리브리스를 덧댄 메종 마르지엘라의 코트형 원피스도, 풍성한 볼륨을 입혀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마치 옷에 파묻힌 듯한 느낌을 주는 베트멍의 오버사이즈 코트도 다소 낯설다. 모두 하나의 것에서 시작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각양각색의 모양새를 자랑한다. 드레시한 무드는 덤.
앞서 소개한 코트들이 형태의 변주를 뽐냈다면 이번에는 섬세하고 장식적인 요소 차례다.
맥퀸은 라펠 아랫부분을 따라 몸판을 과감하게 커팅했다. 날렵하게 잘린 구조적 단면 사이로 훤히 보이는 서정적인 잔꽃무늬의 드레스는 봄에 걸맞게 아주 낭만적이다.
발렌티노는 부드러운 핑크에 밝은 베이지색 포켓 디테일을 덧대었고, 로에베는 밑단과 소맷단에 극적인 프린지 디테일을 더해 완연한 봄의 정취를 흠뻑 돋구었다. 바야흐로 봄이다.
와일드한 데님 소재가 트렌치코트와 만난다면? 어깨선을 둥글게 감싸는 가벼운 데님은 제법 잘 어울린다. 중후한 멋은 없지만 대신 경쾌한 맛이 있다.
살갗이 비치는 오간자 소재로 만들어진 마르지엘라의 코트도 마찬가지다.
갑옷처럼 단단해 보이는 라프 시몬스의 투박한 가죽 코트는 어떤 매서운 비바람도 모조리 막아줄 것 같이 든든하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광택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
반바지를 멋지게 잘 입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워낙 분방하고 자유로운 옷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후줄근해 보이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조금만 신경 쓴다면 충분히 세련돼 보일 수 있다. 이제 반바지를 입을 땐 셔츠나 면 티셔츠 대신 명랑한 트렌치코트를 걸치자. J.W 앤더슨의 남자들은 무릎 위로 올라오는 면 반바지와 데님 반바지 위에 바지보다 더 긴 코트를 입었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프린트와 패치 디테일이 더해진 재기발랄한 코트는 늘 입던 반바지라도 새로운 옷처럼 느끼도록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클래식한 트렌치코트도, 화려하고 새로운 형태의 트렌치코트 그 어느 것이라도 좋다. 올 봄에는 코트자락을 흩날리며 낭만에 대하여 이야기 해볼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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