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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순이 Feb 09. 2021

3. 부부 심리 상담

난임일기


심리상담을 받아야겠다고 말은 꺼냈지만 만만치 않은 금액에 방문을 주저하던 어느 날 남편은 기념일을 빙자하여 나를 심리상담센터로 데려갔다. 심리상담은 기념일 선물로 적절해 보이진 않았지만 기념일은 큰돈을 턱턱 쓰기에 가장 좋은 명분이 되어준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오래된 빨간 벽돌집과 신축 원룸 건물이 번갈아가며 늘어서 있는 골목길에 들어섰다. 몇 블록을 지나자 모퉁이 건물에 "심리상담"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이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자 온화한 중년의 상담 선생님은 우리를 조용히 반겨주었다. 센터는 크지 않았지만 알뜰히 공간이 나누어져 있었다. 남편은 선생님과 미리 이야기를 나눈 듯 나를 바라보며 "잘 받고 와. 밖에서 기다릴게"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일단 같이 들어오라며 슬리퍼 두 개를 우리 앞에 놓아주셨고 그렇게 우리는 가장 구석에 있는 상담실로 안내되었다. 선생님이 차를 가져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남편은 '내가 왜 여기 있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상담실은 소박했고 소박함이 주는 편안함이 있었다. 책상 옆에는 갑 티슈가 놓여있었는데 나는 저 갑 티슈를 쓰지 않겠다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다짐도 해보았다. 선생님은 두 잔의 차를 우리 앞에 놓아주셨다. 차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고 처음 먹어보는 감칠맛이 났다.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선생님은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물었다.


"정신적으로 힘든데 왜 힘든지를 모르겠어요"

"전 괜찮아요. 아내가 심리상담을 받고 심적으로 편안해졌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각기 다른 대답을 들은 선생님은 종이에 무언가를 적으시고는 짧게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간파당하는 느낌이랄까. 그리고는 웃으며 부부상담을 하자고 제안하셨다. 남편은 아까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진 않았다. 나는 선생님 의견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관계는 예전 같지 않았다. 

 



반대가 끌리는 이유


남편과 나는 서로가 비슷한 성격이라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왔다. 실제로 결혼 준비를 하면서도 크게 다툰 적도 없어서 우리는 취향도 비슷한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심리검사는 우리가 전혀 다른 두 부류의 인간임을 증명해주었다. 나는 한마디로 과대 기능, 남편은 과소 기능이었다. 선생님은 우리의 관계가 부부가 아닌 엄마와 아들 같아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부부가 되기 위해선 나는 내려놓는 연습을 남편은 아내의 짐을 덜어주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임신을 준비하며 아이러니하게도 관계가 점점 서먹해져 갔던 것은 이러한 다름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기대에 부응해보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궁극에 가서는 억누르고 있던 본성이 표출되었던 것이다. 가시적 성과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노력의 강도를 높여갔고 나만큼 노력하지 않는 남편이 미웠다. 그러나 남편은 안 되는 것에 매달리지 않았고 우리의 인생을 살길 바랬다. 그렇게 점점 싸움이 늘어갔고 냉전의 시기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부부의 인생에서 부부는 사라져 갔던 것이다.


심리상담은 우리 부부에게 곪은 상처를 터트리는 과정이었다. 곪은 상처가 진물을 쏟아내듯 우리 부부는 심리상담을 받으며 더 격렬히 싸우기 시작했다. 남편은 심리상담을 받으러 갈 때마다 '오늘은 뭣 때문에 싸울지 두렵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심리상담을 받던 부부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부둥켜 안은채 펑펑 울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장면은 그저 드라마에서나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상처 위에 딱지가 앉고 새살이 나듯 우리는 점점 부부의 인생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임신은 실패와 성공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부부상담을 시작하고 선생님은 심리상담은 정답을 들으러 오는 곳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게 해주는 과정이라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 선생님은 우리 부부를 둘러싼 많은 것들에 질문을 던지셨고 우리는 답을 찾아 마음의 문 이곳저곳을 열며 헤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나에게 왜 임신이 하고 싶은지 물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임신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왜”라는 질문은 임신을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했을 때 따라오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만큼 세상은 결혼과 임신을 당연한 묶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왜"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시부모님, 친정엄마, 나이, 사회적 시선...


하나씩 이유들을 떠올려 책상 위에 펼쳐놓으니 나는 선생님이 "왜"라는 질문을 던졌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타인의 시선에 취약한 편이다. 타인의 말과 평가에 상처 받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그런 나는 평균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 나에게 임신은 '언제까지' 해내야 하는 과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화학적 유산을 하고 집에 돌아와 남편과 펑펑 울었던 그 날이 생각났다. 우리를 스쳐 지나간 인연이 안타깝고 보고 싶어 우리는 그날 오랜 시간 울었다. 그 일이 있기 전 우리는 '생기면 낳고 아니면 말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일 이후로 우리는 아이를 원하다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 되어버렸다.


심리상담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우선 내가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취약한 부분과 그것을 견뎌내는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펑펑 울던 그날의 감정을 내가 길을 잃을 때마다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결실이다. 임신은 실패와 성공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경험이 아니라는 것 이것을 깨달은 이후 나는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셀 수 없는 변화와 힘듦을 경험하겠지만 그 길을 기쁘게 걸어가고 싶었다.


부모의 인생을 열기 위해 임신을 계속 노력할 것이지만 다시 방향을 잃은 채 죽어라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가 행복해야 자녀가 행복하다는 말처럼 우리는 불필요한 갈등을 줄여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는 4달간의 심리상담을 마치고 난임 병원을 방문하기로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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