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배운 세 가지 것들 그리고 늑대와 함께 춤을
나는 여러 번 실패한 사람이다.
태국에서 한 번, 미국에서 한 번. 그리고 베트남에서 또 한 번.
실패의 모양은 매번 달랐지만 그 쓴맛은 비슷했다.
허탈함, 자기 혐오, 그리고 왜 또 이렇게 됐을까 하는 물음들.
그런데 지금 나는 괜찮다. 이상하게도 베트남에 살면서 안식에 도달하게 됐다.
이 나라가 나를 가르쳤다고 말하면 낯간지럽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베트남에서 배운 것이 세 가지 있다.
베트남에서 차를 운전해본 사람은 안다. 오토바이 물결 사이로 차를 몰 때 조급함이 올라온다.
저 오토바이보다 먼저 지나가야겠다, 저 교차로를 먼저 치고 나가야겠다.
그 마음으로 액셀을 밟으면 사고가 난다.
베트남 운전에서 사고가 나지 않는 방법은 하나다. 흐름에 맞춰 나가는 것이다. 느리게 가되 멈추지 않는다.
비켜주면서 조금씩 나아간다. 빠르게 가려는 순간 전체 흐름이 막힌다.
사업을 하면서 같은 것을 배웠다. 베트남 직원들은 느리다. 거래처의 반응도 느리다.
계약 하나가 한국에 비해서 세 배는 오래 걸린다. 처음엔 그게 답답했다.
왜 이렇게 느리냐며 속으로는 화가 났다.
어느 날 깨달았다. 느린 것이 잘못이 아니라 그것이 이 나라의 속도라는 것을.
내 속도를 이 나라에 강요하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맞추는 것이 빠른 길이었다.
느림을 인정하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방향은 유지하되 속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오토바이 물결처럼, 느리지만 결국 목적지에 닿는다.
한국에 있는 동년배 친구들의 자산과 나의 자산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부동산이 오르는 동안 나는 해외를 떠돌았다. 누군가는 회사를 키웠고, 누군가는 아파트를 여러 채 가졌다. SNS에는 그들의 성공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그것을 볼 때마다 뭔가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친구들이 부를 이루는 것을 목격하는 건 기분이 나쁜 일은 사실 아니다.
내가 뒤쳐지고 있다는 그 사실이 씁쓸한 맛으로 남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묵직함이 사라졌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베트남 골목 어딘가에서 쌀국수 한 그릇을 먹고 있었을 때인지,
저녁 바람이 들어오는 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을 때인지.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그리고 대답이 '그렇다'였다.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쉬고 싶으면 쉰다.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난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간다.
여기서 행복한 가정을 이뤘고, 베트남에서 직접 집을 지었으며,
10년째 현지서 행복한 생활이 가능한 수입을 만들어주는 나와 집사람이 직접 일군 작은 회사가 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타인의 자산이 내 행복의 기준이 되지 않는 삶.
이것은 베트남이 아니어도 통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말은 들었다.
그런데 말로 듣는 것과 몸으로 겪는 것은 다르다.
베트남에서 나는 그것을 몸으로 배웠다.
아마 이 나라의 속도와 온도가 그 과정을 더 빠르게 만든 것 같다.
나를 낮추는 것은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불필요한 비교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더 크게 보인다.
나는 스스로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태국에서 실패하고, 미국에서 실패하고, 그러고도 베트남에 오면서 이번엔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이 생겼다고. 좋은 파트너를 알아볼 수 있다고.
그러나 그 믿음은 여지없이 깨졌다.
좋은 파트너라고 믿었던 사람과 같이 회사를 만들고 내가 제안한 아이템은 정확하게 시장에 적중했다.
사업이 자리를 잡았고 자본금에 비해서 단숨에 10배까지 성장한 회사가 됐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없어도 되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었다.
투자금은 돌려받았지만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나와야 했다. 쫓겨난 것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의 감정은 잘 설명이 안 된다.
배신감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창피함이 더 컸다. 또 이렇게 됐다.
그 감정의 밑바닥에서 한동안 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안 된다는 것을 이전 실패들이 가르쳐줬다.
바닥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일어서는 법을 잊는다.
'늑대와 함께 춤을' -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을 한 영화가 있다.
백인 가정의소녀였으나, 포니족의 급습으로 가족들이 전부 죽고 혼자 도망쳐 수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
그들과 함께 살게 되는 여성의 이름이 있다. “주먹쥐고 일어서”.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는 내가 바로 베트남에선 “주먹쥐고 일어서가 됐다”.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내가 그 장면을 떠올린 것은 그 상황이 나와 딱 맞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선 외지인이였고 사업 실패를 하면 항상 감정의 공간에는 혼자만 남았기 때문에
그녀와 나의 처지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세상이 나를 쓰러뜨렸을 때 결국 일으켜 세우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
그것이 세 번째 실패가 준 선물이었다.
남을 믿는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근육이 생겼다는 것.
더 이상 누군가가 와서 구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게 됐다.
베트남이 나를 가르쳤다고 했지만, 정확히는 베트남에서의 시간이 나를 가르쳤다.
느림을 인정하는 것, 나를 낮추는 것, 스스로 일어서는 것.
이 세 가지는 어디서나 통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베트남이라는 나라에서, 사업 실패와 배신의 긴 골목들을 걸으면서 그것을 배웠다.
실패를 겪고 나서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그 보이는 것들이 지금 나를 여기 서 있게 한다.
그리고 그 만족감에 도달하는 데 있어서 베트남이 날 가르쳤다.
나는 지금 괜찮다. 어쩌면 나 자신은 이미 늑대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