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두 번 겪은 사람들의 얼굴
장모님의 눈을 처음 제대로 들여다본 것은 결혼한 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밥상 앞에서, 아내와 나란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혹은 마당에서 채소를 다듬으면서.
그 눈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 눈빛을 뒤로하고 돌아설 때마다 한참 동안 멍해지는 시간이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그 안에 있었다.
깊다, 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슬프다, 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그윽한 눈빛이었다
그 단어가 가장 가까웠다.
그 눈빛은 어디서 온 것일까
장모님 세대의 베트남 여성들은 전쟁통을 두 번 살았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나고 채 숨을 고르기도 전에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베트남전이 1975년에 끝났을 때 장모님은 이미 젊음을 전쟁 속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아이들을 지켰다. 폭격 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을 품에 끌어안고 어딘가로 숨었다.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많았다. 장모님 역시도 남편을 한 번 잃었다.
세 아들들을 프랑스로 보내고 혼자 살았던 여성의 아픔은 어떤 것일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매년 아내의 배다른 오빠들이 프랑스 연휴를 맞아 번갈아 가며 우리 집에서 한 달 정도를 보내고 있다.)
남편 없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텨야 했던 여성들.
전쟁이 끝나도 삶은 쉽지 않았다. 통일 이후 베트남은 오랜 시간 가난했다.
다시 결혼을 하셨지만 남편은 트럭을 밤낮으로 고쳐도 장모님은 시장에서 채소를 팔았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준비하셨다. 가정을 꾸릴 정도의 돈을 지금의 장인은 집에 가지고 오지 않고 술만 마셨다고 들었다.
그래도 아이들의 밥상은 언제나 차려졌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나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세월이 그 눈빛을 만들었다고 가늠할 뿐이다.
어떤 표정을 지어도 그 눈 안쪽에는 무언가가 가라앉아 있었다.
고요한 것 같지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장모님과 나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처음 몇 년은 아내가 통역을 해줘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베트남어는 인사와 감사 정도였고, 장모님이 할 수 있는 한국어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편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무한의 따스함이 전달되고 있었다
밥을 더 먹으라고 그릇을 밀어줄 때, 새벽에 일어나 내 신발이 젖어 있으면 말없이 닦아둘 때, 내가 몸이 안 좋아 방에 누워 있으면 문 앞에 과일을 놓고 조용히 사라지실 때. 그 행동들은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가 없어서 더 선명하게 전달됐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다정함이라는 것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아무 말 없는 다정함. 그것이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
장모님은 불평을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드셨고 몸이 늘 좋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먼저 하는 일이 없었다.
아내가 물어봐야 이야기했고, 그것도 짧게 하거나 했다. 덥다거나 힘들다거나 외롭다거나.
그런 말들을 나는 장모님 입에서 들은 기억이 없다.
아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까지 웬만한 부잣집이 아니면 커피를 마시는 것도 허용이 안되던 시기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나는 전혀 실감을 하지 못했다.
베트남 시장에서, 골목에서, 오래된 카페 앞에서 마주치는 나이 든 여성들의 표정에서도 비슷한 것을 봤다.
얼굴에 주름이 깊고, 손이 거칠고, 등이 굽었지만 표정은 평온했다.
삶이 무겁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얼굴에 얹어두지 않는 태도.
나는 그 반대였다. 작은 불편도 말했고, 사소한 억울함도 표정에 드러냈다.
코로나 락다운으로 베트남 전역이 봉쇄되고 닭 한 마리 채소 한 바구니도 군인들이 집 앞으로 직접 전해주던 시기에는 어떻게 가족을 이끌어야 할지, 앞으로는 "어떤 세상이 도래할까" 하는 미완의 공포가 매번 엄습했다.
전쟁을 살아낸 것도 아니고, 굶어본 적도 없고, 남편을 잃어본 것도 아니면서.
그 부끄러운 비교는 오히려 나를 돌아보게 했다.
무겁게 살면서도 평안을 가지는 눈빛은 어디서 온 걸까.
그것이 장모님에게서 본 내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나는 아직 그것을 잘 알지 못한다.
베트남의 나이 든 여성들은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다.
전쟁의 영웅으로 기록되지 않았고, 독립 운동의 지도자로도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없었다. 전쟁 중에 아이들을 키웠고, 남편이 없는 자리에서 가족을 지켰고, 가난 속에서 밥상을 차렸다.
그 일들은 이제 이 나라의 역사가 됐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면서 장모님의 눈빛이 그윽한 이유를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것은 슬픔이 굳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겪고도 무너지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침착함이다.
모든 풍파를 통과하고 나서 비로소 생기는 고요함이다.
나는 그 눈빛 앞에서 나의 불평들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배운다.
그리고 동시에, 작은 것들에도 불평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를 배운다.
베트남 할머니들이 나를 가르쳐 준 것은 말이 아니었다.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