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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꼭지 끝까지 틀면 물낭비던데…

미니멀리스트를 가장한 맥시멀리스트

by 철없는박영감

* 이 글은 Spotify for Podcasters (舊 Anchor)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s://anchor.fm/-6552/episodes/ep-e1vsink


먹고 나면 그때그때 치우자고 생각은 하는데... 오늘도 싱크대에는 안 씻은 그릇들이 쌓여있다. 아침을 먹으려면 설거지를 해야 한다. 그릇도 그릇이지만 사과를 자를 칼이 없다. 그리고 닭가슴살을 집을 포크가 없다. 처음 이사 와서 지인들과 홈파티를 몇 번 해보니 정리정돈에는 엄청난 노동이 들어갔다. 특히 설거지가 도저히 감당이 안 됐다. 그래서 6인용 식기세척기를 샀다. 맛집 광고문구 같지만, 아마 한 번도 안 써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써본 사람은 없을 거다. 식기세척기... 신세계다. 이후 설거지는 일주일을 모았다가 주말에 한 번에 처리했다. 일주일을 모으다 보니 그릇과 수저가 더 필요했다. 진짜 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살 던 때였다. 손가락은 이미 뇌를 건너뛰고 쇼핑앱에서 식기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렇게 건강까지 챙겼다는 뿌듯함과 함께 방짜유기를 주문했다. 조금 비쌌지만 세일을 엄청나게 해 준다고 해서 홈파티 때 쓸 생각으로 넉넉히 6인조 수저와 티스푼, 포크, 나이프, 4인조 옥면기와 밥그릇 세트, 12피스 접시와 반찬그릇을 주문했다. 지금은 수저 한 벌과 접시 1개 정도만 쓰고 전부 찬장에 장기 체류 중이다. 반성한다. 과했다.


더 큰 문제는 방짜유기는 식기세척기를 쓸 수 없었다. 아니 쓸 수는 있는데 얼룩이 많이 생겼다. 얼룩은 수세미로 문지르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았다. 상관 안 하고 그냥 써도 건강에 아무 문제없다고는 하지만, 안 그래도 다이어트식단한다고 하루에 한 끼만 제대로 식사를 하는데, 얼룩진 그릇에 먹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백수니까 시간도 많고, 그릇도 별로 안 쓰니까 전기도 아낄 겸 손 설거지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요즘 이 지경이다. 일단 고무장갑을 낀다. 물을 틀고 열심히 설거지를 한다. 쓱싹쓱싹, 문질문질, 쏴아아 열심히 설거지를 끝냈다. 건조대에 그릇들을 차곡차곡 쌓고 행주로 싱크대 주변 물도 싹 닦아 정리하고 돌아섰는데 주방 바닥에 홍수가 났다. 옷도 다 젖었다. 수도꼭지를 최대로 틀어 설거지를 했는데 그릇이랑 싱크대 여기저기에서 물이 튀면서 옷을 다 적시고, 주방 바닥에까지 다 튄 것 같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바닥도 닦기로 한다. 욕실에 가서 걸레를 빤다. 쓱싹쓱싹, 문질문질, 쏴아아 깨끗해진 걸레를 밀대에 끼우고 바닥에 물을 열심히 닦는다. 물을 닦는 중에 바닥의 얼룩도 같이 닦인다. 바닥이 깨끗해지니 기분이 좋아졌다. 디스크로 허리가 아프지만 이 정도는 할 만하다. 주방바닥을 다 닦으니 걸레에 물기가 마른 것 같다. 다시 걸레를 빨기 위해 욕실로 간다. 그런데 욕실도 홍수가 났다. 여기서도 수도꼭지를 최대로 틀어 걸레를 빨고 나서 계속 깨끗한 물에 빨겠다고 물을 틀어놓은 상태로 놔뒀다. 물이 대야에서 넘쳤고 수채구멍이 머리카락으로 막혀서 물이 잘 안 내려가고 있었다. 아... 멍청함의 끝을 보았다. 갑자기 허탈해졌다. 기운이 쭉 빠졌다. 그리고 앉아서 생각했다. 왜 수도꼭지를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최대로 틀었지? 습관인가? 세수할 때 수도꼭지는? 음… 최대로 틀어놓는다. 비누칠할 때는? 똑같다. 헹굴 때 손에 물을 받아 푸푸 하며 씻는데 그때는? 틀어놓는다. 면도할 때…? 아… 세수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욕실에 들어가면 세면대 앞에 서자마자 그냥 수도꼭지를 최대로 틀어놓는다. 마냥 물을 흘려보내면서... 옷이 젖고 바닥이 흥건해지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어렸을 때는 세면대에 물을 받아놓고 씻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얼굴에 폼클렌징을 하면서 각질과 피지를 없애겠다고 2분을 문지르고 있는데 물을 틀어놓고 있을 이유가 없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도 마찬가지다. 물을 많이 틀면 더 빨리 더 깨끗이 씻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역시 반성한다. 과했다.


병적인 빨리빨리, 얼른얼른 수준의 조급증까지는 아니지만 이상하게 ‘세게, 강력하게, 한 번에‘ 이런 단어들로 생활이 채워지고 있다. 그나마 의미가 있는 활동이면 모르겠는데 무의미하다 못해 쓸데없는데 힘을 빼고 있다. 청소기를 돌릴 때도 최대흡입량도 모자라 터보 스위치를 켜고, 이두박근을 키우는 아령운동이라도 하듯이 벅벅 바닥을 밀어댄다. 청소기로 10번을 왔다 갔다 해도 머리카락이 계속 보인다. 비싸게 주고 산 무선청소기가 제 몫을 못하는 것 같아서 제품 하나 똑바로 못 만든다고 제조사를 욕한다. 이렇게 청소기를 돌리면 청소를 절반도 못하고 배터리가 다 소모된다. 그러면 배터리 용량도 적으면서 흡입력도 약하다고 다시는 이 회사 거 안 산다고 씩씩 댄다. 그런데 나중에 알았다. 최소 흡입량으로 힘 빼고 천천히 두세 번만 왔다 갔다 하면 바닥이 깨끗해진다는 것을... 배터리도 집 전부를 청소해도 남는 양이라는 것을... 그래 다시 한번 반성한다. 과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블라인드를 빨리 걷으려고 줄을 세게 당기다가 고장을 냈다. 며칠간 시베리아 한파 때문에 환기를 못해서 답답했는데, 눈은 내리지만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와 이때다 하고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을 열려고 했다. 빨리 환기시키고픈 생각에 있는 힘 껏 블라인드 줄을 잡아당기다가 갑자기 팅 소리가 나더니 헛돌기 시작한다. 그거 세게 당겨봤자 한 10초 빨리 걷으려나? ‘과유불급’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사자성어에 불과했다. 나에게 울림을 주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 말이 가슴에 확 꽂힌다. 너무 넘치게 살아온 것은 아닌지... 그동안 물건을 낭비하듯이 나 자신을 낭비한 것은 아닌지... 그러면서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생각에 갇혀서 인생까지 낭비한 것은 아닌지… 부족함은 영감의 원천이라는데… 이제는 샤워할 때도 물은 절반만 틀어서 한다. 내가 테스트를 해봤는데 물을 최대로 트나, 절반만 트나 걸리는 시간은 같다. 더 깨끗하고 빠를 거라는 것은 나의 생각일 뿐이다. 샤워볼에 샴푸를 짜서 두세 번 쥐었다 폈다 하고는 거품이 왜 이렇게 안 생기지 하고 샴푸를 더 짜는 조급한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샴푸를 추가로 짜서 더 많이 생긴 거품에 샤워기로 물 한 번 끼얹고 왜 거품이 아직 안 닦였지 하는 조급한 생각일 뿐이다. 수도꼭지를 끝까지 틀면 틀수록 그냥 흘려버리는 물만 늘어난다. 미니멀리스트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내 생활은 맥시멀리스트였다. 진짜 반성한다. 그동안 정말 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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