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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배부르게 하는 건 밥이 아니라 김칫국물이던데...

지금좌표는 YOLO와 FIRE 사이 무풍지대 그 어딘가...

by 철없는박영감

* 이 글은 Spotify for Podcasters (舊 Anchor)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s://anchor.fm/-6552/episodes/ep-e208qjp


자려고 누워있는데 갑자기 글감이 떠오른다. 떠오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상상의 바다로 점점 깊이 빠져든다. 여기저기서 상상의 바다 위로 상념들이 떠오른다. 이것들만 잘 건져 올려 요리조리 잘 맞춰 글을 쓰면 대문호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날은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에피소드가 떠오른 글감과 착착 맞아떨어진다. 아니 착착 맞아떨어지는 글감이 샘솟는다.

‘나의 천재성이 이제야 발현하나? 그동안 수행자처럼 지낸 시간이 헛된 게 아니었어. 이 정도면 베스트셀러 작가도 문제없겠는데… 베스트셀러 작가로 돈 많이 벌면 뭐 하지? 서울에 집을 사서 집필활동을 계속할까? 아니면 전원에 햇빛이 잘 드는 대저택을 지어서? 강연요청이 들어오면 어떡하지? 내가 살아온 얘기를 해줄까?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할까?’

망상이 안드로메다급으로 발전한다. 그러다 ‘내일 꼭 써야지’라고 생각하며 잠이 든다. 상쾌한 아침이다. 아주 잘 잤다. 오늘은 햇빛도 유난히 빛난다. 밖은 역대최저기온을 갈아치울 정도로 춥다는데 햇살이 집안으로 비치기 때문인지 내 마음으로 비치기 때문인지 아늑하고 따뜻하니 기분 좋다. 오늘은 쓸 글감이 있어서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꿈을 꾼 것 같기도 하다. 김칫국 제대로 들이켰다. ‘그런데... 어제 글감이 뭐였더라?’ 이런 망상을 하게 한 출발점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글을 풍성하게 해 줄 거라고 생각했던 에피소드들만 조금 기억난다. 어젯밤에는 분명히 착착 잘 맞았는데, 오늘아침에는 뒤죽박죽이다. 개연성이 ‘1’도 없다. 뭐지? 베스트셀러가 점점 멀어져 간다. 집필활동을 할 서울의 집이 멀어져 간다. 대저택이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얼굴만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갑자기 배가 고프다.


오늘 아침도 사과 한 개, 닭가슴살과 오이다. ‘이렇게 꾸준히 먹으면 살이 빠지겠지?’ 단백질과 식이섬유를 이렇게 먹으면 근손실 없이 체지방만 쏙 빠져서, 군살 없고 잔근육만 있는, 옷맵시 나는 모델 같은 몸매가 될 것 같다. 엉덩이를 만져보니 어제보다 탱탱한 것 같다. 힙도 훨씬 업된 것 같다. 허벅지도 좀 단단한 것 같고... 배에 힘을 주니 물컹하던 아랫배도 많이 안 느껴진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부끄러웠던 망상을 까맣게 잊고 거울 앞에 선다. ’어! 이게 아닌데.‘ 상상하던 모습이 아니다. 머리는 유난히 커 보이고, 어깨는 유난히 좁아 보인다. 배도 여전히 볼록하고 팔다리는 가늘다. 머리는 왜 이렇게 많이 빠졌는지 영락없는 ‘반지의 제왕’이다. ‘윽! 가슴이... 가슴이...’ 갑자기 가슴이 아픈 것 같다.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 는 연기를 한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데 몰입한다. 너무 부끄러워서 이거라도 해야 한다. 아카데미 주연상 감이다. 앗! 또 김칫국이다. 인생 자체가 김칫국이구만... 이 유산균들 다 어쩔 거냐... 아마 내일 아침에는 이놈의 망상을 독소와 함께 몸 밖으로 전부 밀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이번글은 라이킷이 많을 것 같아. 구독자가 늘어날지도... 갑자기 출간요청이 들어오면 어떡하지?' 푸하하. 정말 나잇값 못한다. 나 왜 이렇지? 뭐가 문제인 거야? 로또 1등 되는 상상을 하는 것보다 더한 사행성을 스스로 조장하고 있다. 20대에는 로또를 사며 취직 안 하고 YOLO족으로 사는 상상을 했고, 30대에는 경제적 자유를 이룬 FIRE족을 상상하며 샀다. 그렇게 40대가 되어서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취직도 안 하고 경제적 자유와는 거리가 먼 백수가 되었다. '1일 1 현자타임’이 절실한 것 같다. 노벨 문학상을 타기 위해 열심히 읽고 쓰고, 모델 몸매가 되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고 식단 조절하고 (어제 먹은 감자칩 반성합니다), 경제적 자유를 이루겠다며 로또나 주식을 사는 대신 책을 사야겠다.


이제껏 배부르게 마신 김칫국물을 생각하며 한바탕 크게 웃은 이 에피소드가 이렇게 글이 되고 있으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엉뚱함이나 발상의 전환, 참신함과 파격, 혁신과 미래는 이런 망상에서 출발할 테니까... 작년 퇴사직전에 하도 마음이 답답해서 찾아간 점집에서 그랬다. 2023년부터 대운이 들어 50대에는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될 거라고... 그게 베스트셀러 작가 되는 건지 물어볼걸 그랬다. 별 따러 가는 길… 당 떨어져 힘들면 밥 대신 쌉싸름 하지만 살 덜 찌는 카카오 함유량 82% 다크초콜릿으로 당을 보충하고, 초콜릿만 먹으면 느끼하니까 김칫국 한 사발 드링킹 하면서 가보자고 생각한다. 이제는 글 쓰는 속도도 향상되는 중이고 보상은 없지만 옛날부터 바라던 ‘라디오 들으면서 할 수 있는 일…' 글쓰기를 하고 있다. 아마도 지금의 좌표는 YOLO와 FIRE 사이 무풍지대 그 어딘가에서 방황 중일 것이다. 그래도 별은 보여서 다행이다. 방향은 잡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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