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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의의 용사다"는 개뿔, 악당 외계인이던데...

"옛날 옛날 한 옛날에…"

by 철없는박영감

* 이 글은 Spotify for Podcasters (舊 Anchor)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s://anchor.fm/-6552/episodes/ep-e221nbd


"…다섯 아이가 우주 멀리 아주 멀리 사라졌다네...”

80년대 국민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지구방위대 후뢰시맨’, 개조실험제국 메스의 지구 침공을 막는 정의의 용사. 요즘이 ‘어벤저스’ 라면, 그때는 ‘후뢰시맨’이 있었다. 나를 정의감에 불타게 했고, 바른생활 사나이로 키워줬으며, 상상력을 폭발시켰다. 게다가 쫄쫄이 의상에 대한 거부감도 줄여줬다. 어렸을 때, 왜 그렇게 흰 타이즈에 반바지를 입혔는지 모르겠다. 후뢰시맨은 나의 우상이었다. 어른이 되면 후뢰시맨이 되려고 했다. 후뢰시맨은 동료들과 우정, 사랑 그리고 정의감으로 지구 침략 계획을 막아낸다. 중간중간 좌절할 때도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동료들의 도움과 주변 사람들의 응원으로 역경을 극복하고 레벨 업해서 외계 침략자를 물리쳐 최후의 승자가 된다.


개조실험제국 메스의 악당들은 '대제 라 데우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앞다퉈 매번 새로운 지구 정복 작전을 계획한다. 이들도 잘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들끼리도 내부에서 경쟁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나중에는 잘 나가는 놈을 시기, 질투해서 서로 작전을 방해하기도 하고, 공을 가로채기도 한다. 내부 분열로 잘 나가던 작전이 엎어지면 서로 남 탓하며 책임을 전가한다. 잘 나갈 땐 내 탓! 망하면 니 탓! 악당 개개인의 능력은 출중한데 모아놓으면 멍청이가 된다. 왜 꼭 회사 얘기 같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옛날 옛날 한 옛날에 후뢰시맨을 꿈꾸던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정의감 넘치고 바른생활 사나이가 되겠다던 그 소년은 우주 멀리 아주 멀리 사라졌다. 지금은 도리어 성과지상주의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애쓰고, 남들보다 더 잘 되려고 내 것만 챙기는 개조실험제국 메스의 간부가 되었다. 그렇다 나는 악당 외계인이었다. 곰과 호랑이는 쑥과 마늘을 먹으면 인간이 될 수 있다는데 외계인은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으려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악당 외계인이 돼야 하는 것일까? 만약 인생이 그런 거라면 나는 조카들에게 어벤저스나 후뢰시맨을 보여줄 수 없을 것 같다.


신입생은 영어로 “Freshman”이다. 그래 바로 그 “후뢰시맨”이다. 신입사원 장기 자랑에서 한동안 유행했던 레퍼토리가 빨주노초 쫄쫄이를 입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후뢰시맨 퍼포먼스였다. 아직 사회의 때가 덜 묻어있는 그들은 ‘후뢰시맨’이자 동시에 개조실험제국 메스의 간부 후보생이다. 나도 어디선가 총천연색 쫄쫄이를 입고 열심히 뛰어다녔건만 결국은 악당 외계인이었다. 주변에서 후뢰시맨이었다가 악당 외계인으로 변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 나보다 더한 악당에게 치를 떨었고, 좀 덜한 악당은 싹을 잘랐다. 더 높은 곳을 쫓으며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제는 도망쳐 나왔지만 다시 후뢰시맨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리고, 상상력 풍부하고, 순수하던 그 시절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과와 성공만을 추구하는 악당 사회에서 탈출은 했으니 지구별에서 힘을 숨기고 살아가는 은둔 외계인이 되야겠다. 지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새로운 정의의 용사인 어벤저스가 역경에 빠졌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수련을 해야겠다. 그러다가 화석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퇴사 후 성공했다는 일화는 많이 들었다. 그리고 실패했다는 일화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일화는 하나같이 악당 사회에서 도망쳐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악당 제국을 건설하는 얘기로 들린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연인이다'까지는 아니고, 조직에서 벗어난 삶을 시작하고 있다. 결과에서 벗어나 노력과 과정에 집중하고 싶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갈지 방향성을 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방향으로 새 출발 하는 ‘후뢰시 외계인’이 되고자 한다. 변신 구호를 외쳐본다.

“프리즘 후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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