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다음 사랑, 글쓰기
어렸을 때부터 그리는 걸 좋아했다. 시골 외할머니댁에 엄마 없이 몇 주씩 맡겨져도 커다란 달력 한 장 뜯어주면 하루종일 그 뒤에 그림을 그리며 울지도 않고 잘 놀았다. 달력을 하도 뜯어서 7월인데 벽에는 11월이 걸려있곤 했다. 공주님 그림을 아주 잘 그렸는데 어디서 배운 적도 없이 그림동화책에 공주님 드레스를 잘 따라 그렸다. 그때 재능을 잘 키웠으면 앙드레 박이 되었을지도... 그러다가 외삼촌댁 형이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둘째 형이다. 나랑 잘 놀아줬는데, 악마 미운 4살이던 그때,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내 종이에 그림을 못 그리게 했는데 그 형은 그리게 해 줬다.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형은 로봇 태권 V를 멋있게 그려냈다. 나의 관심사는 순식간에 로봇 태권 V로 바뀌었다. 그 뒤로는 로봇만 그렸던 것 같다. 당시에 일본 애니메이션 건담과 마크로스가 유행했다. 어려서 내용은 몰랐고 로봇 디자인에 매료되어 TV에서 한번 본 로봇을 그대로 따라 그렸다. 그때 재능을 잘 키웠으면 뭐가 되는 거지? 동생도 그림은 한 번도 배운 적 없는데 에반게리온에 빠지더니 여주인공 '아야나미 레이'를 똑같이 그려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워낙 그리는 게 좋아서 미술학원을 다니고 싶었다. 태권도나 합기도 학원이라면 보내줬겠지만 미술학원은 안 보내주었다. 태권도는 유치원도 다니기 전에 보내졌다가 첫날 울면서 돌아오고서는 얼씬도 안 했다. 당시에 기합을 넣으며 발차기와 정권 지르기를 하는 형들의 표정이 너무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합기도는 친구 아버지가 도장을 운영해서 다니게 되었는데,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 부모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집에 가서 합기도 학원 보내달라고 할게요' 했다가 아버지가 얼씨구나 하고 바로 등록해서 다니게 되었다. 내뱉은 말이 있어서 꾹 참고 2년 다녔지만 지금도 평화주의자인 나는 워낙 격투기를 싫어해서 노란띠가 최종 등급이었다. 친구가 전학을 가고는 바로 그만뒀다. 반면에 그림은 백일장 대회를 자원해서 나갈 정도로 열정이 넘쳤고, 물감, 팔레트, 붓 등 수채화 미술도구를 잘 사모았다. 중학교 때는 미술선생님이 나의 재능을 알아보고 일본 유학까지 갈 수 있는 길을 알아봤지만, 정확하지는 않지만, 부모님이 반대하셨는지... 학교에서 과학고 진학공부를 시키겠다고 했는지... 내가 미술보다 공부하겠다고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미술을 취미로 생각했던 것 같다. 깊게 파지는 않고 그냥 즐기는 걸로 끝내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인생의 첫 번째 기회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그 후로도 그림은 계속 그렸고, 지금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슬램덩크나 드래곤볼 같은 일본 만화를 접하면서 만화를 주로 그렸다. 그때 재능을 잘 키웠으면 웹툰작가가 되었으려나...
그 뒤로는 입시 등 세상살이가 바빠져서 그림은 한동안 못 그렸고, 또 스타크래프트를 앞세운 PC방의 침공으로 여가시간 대부분을 게임만 했던 것 같다. 게임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질 즈음,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연필을 들고 다니면서 크로키에 한참 빠졌다. 직장인 초보 시절, 지방으로 발령을 받고 와서 차를 몰고 주말에 교외로 많이 다녔다. 화판에 스케치북이랑 연필, 물감을 챙겨서 풍경화를 그리러 많이 다녔다. 직장 동료들이 내 방에 왔다가 이젤에 올려져 있는 풍경화를 보고 그림은 또 언제 배웠냐고 물으면 거만한 표정으로 그림을 배워서 그리냐고 반문했더랬다. 재수 없다고 욕은 했지만, 그 뒤로 이젤이랑 수채화 용품 산 사람이 꽤 있었다. 좋아하는 것은 어떻게든 찾아서 하게 되어있다. 다시 사회생활이 바빠져 그림을 한동안 안 그리다가 퇴사를 하고 백수가 되었으니 내가 좋아하는 것을 업(業)으로 해보겠다며 그림을 다시 그리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업으로 하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가벼운 마음으로 슥슥 그리던 때처럼 되지 않았다. 뭔가 좀 심각해지고 무거워졌다. 스케치북 위에 선하나도 그을 수 없었다. 그림을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런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학원을 다니기에는 돈이 많이 들 것 같아서 서점에 가서 드로잉 교본을 샀다. 진지하게 배우려고 작정하니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재미로 업을 삼으려고 하는 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깨달았다. 지금은 이모티콘을 만들어 보자는 계획만 갖고 있을 뿐이다. 그림은 첫사랑으로 남기고...
요즘은 글쓰기가 재밌다. 좋아했던 그림에서 손을 떼며 깨달은 바가 있어서... 취미같이 설렁설렁 시작했는데 조금씩 진심이 되어간다. 그럴 때는 속으로 '워워'를 외치며 나중을 위해 하루에 5장만 쓰자라고 진정한다. 그래도 재밌고 좋아하게 되어버리니 계속 글쓰기만 하고 싶어 진다. 그림에 지쳐봤던 기억이 있으면서 금세 잊어버리고 이번에는 글쓰기 쪽으로 마음이 쏠린다. 글쓰기도 배운 적이 없다. 좋아하는 것은 역시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알아서 도서관에서 작법책을 찾아보기도 하고, 철학이 약하면 글이 가벼울 것 같아서 철학책을 찾아 읽는다. 요즘 계획은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작들을 읽는 것이다. 좋아하니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넘친다. 말 안 해도 내가 알아서 잘해주고 싶다. 나의 두 번째 사랑이 슬그머니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아침식사를 하고 또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브런치를 검색하니 화면에 글쓰기 교실 광고가 쭉 뜬다. '아! 글을 꼭 배워서 써야 하나?' 또 거만한 표정이 된다. 갑자기 첫사랑 생각이 난다. 좋아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날씨도 풀리는 것 같고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