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옷을 산다. 이제 평범한 스타일은 성에 안 차던데

아방가르드는 포기 못하지...

by 철없는박영감

퇴사한 지 얼마 안 됐던 백수 초보시절 이야기다. 문득 거울에 딱 '회사원' 같은 외모를 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새치가 조금 있지만 2:8로 말쑥하게 빗은 머리, 팔자주름과 다크서클로 피곤해 보이지만 말끔하게 면도된 얼굴, 역삼각형과는 거리가 먼 정삼각형의 라운드 숄더, 그런 어깨와 얼굴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경추 분리될 것 같은 거북목, 그리고 잦은 음주로 내장지방 가득할 것 같은 복부. 어휴... 이런 몸뚱이에게 바지는 허리가 꽉 끼고 엉덩이는 헐렁해서 허리둘레 맞춰 바지를 사면 옷감의 삼분의 일은 잘라야 기장이 맞다. 뭐 어쨌든 심경에 변화가 일어나면 사람은 외모를 바꾸고 싶어 하는 게 맞나 보다. 이별 후에 여자들이 쇼트커트를 하거나, 남자들이 몸짱 되겠다고 갑자기 단백질 파우더나 닭 가슴살을 사 모으는 것만 봐도 그렇다. 나도 가장 먼저 '자유인 (a.k.a 백수)'에 걸맞은 외모로 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라운드 숄더와 거북목은 장기 프로젝트로 헬스 트레이너에게 맡기기로 하고, 팔자주름과 얼굴크기는 경락마사지숍에 맡기기로 한다. 문제는 헤어스타일. 바로 단골 미용실에 예약을 했다. 코로나19로 한동안 미용실을 안 가서 머리가 많이 자랐다. 예전부터 '자유인'하면 떠오르는 머리 스타일이 뭔가? 그렇다. 바로 '장발'이다. '그래, 머리를 길러보자!' 하지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머리를 기르다 보면 '거지 존'이라는 마의 구간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게 답이 없다. 뭘 해도 그냥 거지 같다. 그래서 '펌'을 많이 선택한다고 한다. 즉시 검색창에 '남자 펌'을 검색했다. 검색된 이미지들을 보면서 과감해져 보자는 생각이 들어 요즘 유행한다는 '히피펌'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인터넷에서 연예인들 히피펌 사진을 찾다가 '그래, 바로 이거야!' 하는 스타일을 찾았다. 짜잔!

알아요. 무슨 말할지 안다고요…

그래 나에게 돌을 던져라..! 스타일은 내 마음이니 어쩔 수 없다. 마음속으로 스타일을 정하고, 예약시간에 맞춰 미용실에 갔다. 미용실 의자에 앉자마자 원장님은 익숙하게 바로 목에 천을 두르고 바리깡을 들었다. 소심한 나는 예전 같으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해주는 대로 있다가 결재하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제 자유인이다. 과감하게 변신하려고 여기 왔다. 용기를 냈다.

"저... 원장님... 이런 스타일을 하고 싶은데요."

스마트폰을 슬쩍 내밀었다. 갑자기 현타가 오며 얼굴은 귀까지 새빨개졌고, 앞머리는 땀범벅이 되어 이마에 찰싹 달라붙었다. 범죄를 저지르기 전 초조함이 이럴까? 원장님은 당황했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고 스마트폰을 건네받고 유심히 봐주었다. 웃지 않고 봐준 것만도 감사한 심정이었다. 우선 탈색과 펌은 동시 진행이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커트만 하는 줄 알고 한 시간 뒤에 다른 예약을 받았다는 것이다. 초조함으로 온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고, 목에 천까지 둘러져 있어서, 마치 한증막에 있는 듯했다. 변화고 뭐고, 그냥 빨리 나가고 싶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자유인이다. 자유인이 돼서, 남는 게 시간이다. 내일 다시 와도 되니 이 스타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다행히 먼저 확인 안 해서 미안하다며 양해해 주면 내일 더 잘해주겠다고 했다. 다음날로 다시 예약하고 일단 미용실을 나왔다. 쫓기듯이 미용실을 나와 운전석에 앉았다 도둑질도 안 했는데 도둑질한 것 같았다. 벌렁대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시동을 걸었다.


헤어스타일은 내일 변신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옷을 사기로 한다. 옷장이 총 천연 무채색이다. 온통 후드티에 운동복뿐이다. 간간이 골프복이 있고 그 옆에 골프모자가 한가득이다. 훗! 헤어스타일도 바꿀 건데... 거기에 맞는 옷이 필요하다. 아! 피어싱도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니 지금 있는 옷으로는 변화 의지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 쇼핑앱을 검색하다가 한 사이트에 관심이 갔다. 정확히는 한 단어에 꽂혔다.

"아방가르드 : 기성의 예술 관념이나 형식을 부정하고 혁신적 예술을 주장한 예술 운동 (출처 : 네이버 표준국어대사전)"

사진 속의 모델들은 뼈밖에 없는 말라깽이들 뿐이다. 그래서 아방가르드가 잘 어울린다. 그래도 역시나 '자유인 (a.k.a 백수)' 정신을 발휘하기로 한다. '내가 입을 만한 게 있을까?' 가만히 보니 아방가르드가 기본적으로 오버핏이라서 나도 충분히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바지가 문제인데 와이드 핏이기는 한데 잘록한 허리 표현이 관건이다. 열심히 고르다 보니 사이즈만 있으면 입을 만한 디자인이 있다.

출처를 밝히면 광고가 되려나요? [출처 : LABel M]

사이즈를 보니 L사이즈 허리치수가 40이다. 내가 요즘 다이어트가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니 저 정도 사이즈면 M사이즈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그래도 일단은 제일 큰 사이즈를 주문했다. 셔츠도 몇 개 같이 주문했다. 사이트에 코디가 잘되어 있어서 쉽게 고를 수 있었다. 온라인 쇼핑이라서 저렴할 줄 알았는데, 스타일이 유니크해서 그런지 금액이 제법 나갔다.


옷 구매를 마치고 다음날이 되어 미용실로 갔다. 하룻밤동안 펌 검색을 엄청나게 했다. '막상 펌을 하니 망했다'부터 펌 스타일 관리를 위한 제품 광고까지 다양했다. 내 검색이 알고리즘을 탔는지 망한 머리 되살리는 영상이 계속 나왔다. 나는 제발 망하지 않기를 바라며... 미용실 원장님 원망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의자에 앉았다. 처음 보는 도구들이 많이 나왔다. 이마에 투명한 선캡 같은 것을 붙이고 목 주변에 변기뚜껑 모양의 그릇을 장착하고 양념통같이 생긴 용기로 머리에 액체를 뿌려댔다. 롤로 머리를 말고 랩으로 감싸더니 여성 고객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빙글빙글 돌아가는, SF영화에서나 볼 법한 우주선 엔진 같은 기구를 머리 주변으로 돌렸다. 잠시 후, 또 양념용기로 액체를 뿌려대더니 샴푸를 했다. 머리를 말리고 드라이를 해주는데 평소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다. 단골 미용실이라서 아는데 원하는 스타일이 안 나오면 드라이 기술이 현란해지는데... 오늘 바로 그날인지 드라이 기술이 현란하다. 설명도 많다. 처음이라서 지금 당장은 어색해도 며칠 지나 자연스럽게 자리 잡으면서 괜찮을 거란다. 원장님의 말발에 현혹되면서 괜찮은 건가 싶기도 했지만, 원장님도 표정관리가 안된다. 얼굴근육이 경직되어 가는 듯 한 건 나만의 착각이겠지? 하지만 객관적으로 거울 속에 내 모습은...

한방에 설명 쌉 가능

망한 것 같다. 제발 자리가 잘 잡히기를...


이번엔 피어싱이다. 한쪽 귀에는 한 개, 다른 쪽에는 두 개를 하려고 시도한다. 병원에서 아무렇지 않게 주사를 맞고, 피검사할 때 팔뚝에 주삿바늘을 찌를 때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고 있는데, 귀를 뚫는다니… 식은땀이 폭발했다. 시술해 주는 점원이 무섭냐고 물어본다. 몸을 떨고 있다고 한다. 앗! 심호흡을 한번 길게 하고 해달라고 기합을 넣었다. 쑤욱 귓불로 뭔가가 관통했다. 기분이 요상하다. 좋은 기분은 아니다. 어쨌든 피어싱도 성공! 변신 완성 사진이다.

모자이크 찐하게 넣었으니 안심하시길...

나중에 옷이 도착하고 알았지만 허리치수 40은 inch가 아니고 cm였다. 뒤에 조그맣게 쓰여있더라. 집을 평수로 표기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망했다. 인치로 환산하면 30인치 조금 넘는 치수였다. 어림도 없는 치수였다.


안 하던 짓을 하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내가 그동안 얼마나 시스템 속에서 매뉴얼대로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항상 같은 머리 스타일에, 공장이라서 옷도 작업복으로 매일 똑같았다. 작업 일정도 매년 반복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제품을 생산했다. 휴일에는 쉬기 바빠서 글루밍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휴식도 일처럼 쉬었다. 바쁘게 쉰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아~ 정말 부속품처럼 살았구나.' 심경의 변화로 부속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든 건지, 닳아서 못쓰게 된 부속품이 돼서 심경의 변화가 온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동안 참 재미없게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직장 생활도 나름 보람도 있었고, 또 열정적이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큰 흐름에서 일부분일 뿐이다. 지구는 내가 전부 가볼 수 없을 정도로 크지만 우주에서는 하나의 점에 불과한 것처럼... 지금은 살이 많이 빠져서 30인치 바지 정도는 너끈하게 입는다. 옷스타일은 여전히 아방가르드와 어벙가르드 사이 그 어딘가다. 기존에 입던 옷들과 믹스매치라고 포장해 본다. 그리고 퍼스널컬러 컨설팅을 받아서 '봄 라이트 톤'이라고 진단받았다. 그래서 더 이상 무채색의 옷만 사지는 않는다. 펌은 잘랐다. 엄마가 보자마자 아줌마 같다고 하는 말에 충격받았다. 머리도 많이 빠져서 이제 펌은 못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잘 경험해 봤다. 피어싱은 귀에 염증이 심해져서 병원 가서 의사 선생님에게 혼나고 뺏다. 그렇게 나의 작고 소심했던 변신 프로젝트는 막을 내렸다. 2월 첫날을 맞아 옷을 사볼까 하고 검색하다가 또 아방가르드에 꽂히는 나를 발견하고 변신에피소드가 생각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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