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 내가 못 보는 세상
단언컨대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 by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나는 죽어있으면서, 살아있다. 계속 집안에 있다면... 우주는 소멸했으면서, 불멸이다. 계속 잠들어 있다면... 세상은 냉정하고 잔인한 곳이면서,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이다. 계속 TV를 보고 있다면...
나의 세상은 내 눈과 귀와 코와 입, 그리고 피부, 즉 오감으로 결정된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비행기의 발명으로 세상은 좁아졌으면서 또 동시에 넓어졌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자동차나 비행기는 거리나 환경을 체감상 변화시켜 줄 뿐 관측범위를 넓혀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으로 TV나 인터넷, 인공위성등을 생각할 수 있으나 이것들은 '슈뢰딩거의 고양이'같다. 화면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발생한 진실인지, 일어나고 있는 사건인지, 그냥 그렇다고 믿을 뿐이다. 그렇게 보면 자동차나 비행기처럼 체감상의 변화를 시켜줄 뿐이다.
막연하게 직접 겪고, 경험하고, 실패해 보고, 성공해 보는 것이 더 좋지라고 믿고 있었을 뿐... 실행으로 옮기는 데에 드는 엄청난 의지와 에너지를 나는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대학입시에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아니 그전에 수능시험을 봤을 때, OMR카드로 제출한 시험의 결과를 점수로 받고, 순위가 매겨지면... 이것은 수능시험이라는 행위의 결과를 받았을 뿐이지 내가 무엇인가를 만들어 냈거나, 창조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나는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야 라고 라벨링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사회라는 상자 안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살았다. 퇴사를 하면서 나는 상자의 뚜껑을 열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성적표를 받았다. 결과는 나는 잘못 살았으면서, 잘 살았다.
아이맥스 영화처럼 나의 관측범위를 꽉 채운 화면은 곧 세상이 된다. 거거익선이라며 점점 커져가는 우리 집 TV를 보면 부끄러워진다. 나에게 자극을 주는 것들만 받아들이면, 내 세상은 자극만 남는다. 나에게 오는 것들을 감싸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커져보자. 관측범위를 넓혀보자. 새로운 환경에서 내가 못 봤던 세상을 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