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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익어 가는데...

수확하지 못한 결실들

by 철없는박영감

아파트 생활을 한 지 20년이 넘어서야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무더운 여름 냉수마찰을 하려고 물을 틀면, 분명히 수도꼭지를 찬물로 틀었는데 온수가 나온다. 요즘 같이 볕이 뜨거운 날 ‘수도배관에 머물러 있던 물이 그 안에서 햇빛을 받아 데워졌구나’라고 나름 분석했다. 그렇게 분석한 이유는, 첫 번째 온수가 금방 끊겼고, 두 번째 낮에만 발생했으며, 세 번째 온도가 미온수 정도였고, 네 번째 겨울에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무더운 날씨 속 배관에 머무르며 펄펄 끓지도 못하고, 양도 적으며, 겨울에는 더 차갑게 식는 배관속 수돗물에 성우지망생 시절 모습이 겹쳐졌다.


기초반, 심화반을 다니면서 학원이라는 배관 안에 머물며 선생님이라는 따뜻한 혹은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서서히 온도를 올렸다. 하지만 그 온도는 끓어 넘칠 정도로 열정적이지도 않았고, 잠깐 쓰면 바닥을 보일 정도로 깊지도 않았다. 그리고 주변환경에 따라 더 쉽게, 더 차갑게 변했다. 학원을 다니면 아무래도 수동적으로 공부하게 된다. 더 빨리, 더 쉽게 배우고자 학원에 도움을 청하지만, 배관 안에서 데워주기만을 기다려서는 절대로 스스로 나올 수 없다. 누군가 수도꼭지를 틀어줘야만 한다.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성우지망생으로 실력을 키우는 일은 차라리 열매나 곡식이 알알이 영글어가는 형세와 더 비슷하다. 기초반에서 뿌린 씨에, 심화반에서 물을 주면, 실력은 무르익어 결실을 맺는다. 그냥 맺지는 않고 비, 바람의 시련을 이겨내고 그 안에서 일일이 알 수 없는 여러 변화들이 폭발하며 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에 무르익어 영근다. 어떤 것은 싹을 틔우자마자 솎기도 하고, 어떤 것은 시련을 못 이기고 죽기도 하고, 어떤 것은 제대로 영글지 못해 쭉정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게 맺은 결실을 수확해서 공채시험에서 펼쳐 보이는 것이 성우지망생들의 일 년 살이 일 것이다.


비록 허송세월을 몇 년 보내기는 했지만, 정신 차리고 매진하자 점점 무르익어 영글어 맺히는 결실들이 생겼다. 하지만 심화반 이야기에서 밝혔듯이 제 때 수확하지 못했다. 시기를 놓쳤다. 수확을 포기하고 갈아엎었다가 더 맞는 것 같다. 수확하지 못한 결실들은 그대로 썩어버렸고... 아쉬움을 남겼다. 내년을 기약하는 것도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밭을 메워버리고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났다. 그때 수확하지 못했던 결실들과 무르익어가던 시간들을 써본다. 요즘 미니멀리즘이 대세가 되면서 소유했던 것들을 사진으로 찍어 남긴다고 하던데, 나도 가슴속에 묻어둔 수확하지 못한 결실들을 이렇게라도 남겨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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