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
성경인지, 옛 성현의 말씀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이런 말이 있다. ‘검은 칼집 속에 있을 때 제일 무서운 법’. 칼집 속에 있는 검은 그 능력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무섭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실체를 간파당한 적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미지의 적이다. 성우 공부를 어느 정도 하다 보면 선생님들이 이런 조언을 많이 해주신다. “본인 능력의 100%를 다 꺼내 보이지 마라” 이쯤에서 눈치 빠른 분들은 앞에서 왜 검 얘기를 했는지 '아~' 하실 거다. 처음에는 그저 밑천 드러내지 말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꺼내보여라 정도로 이해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한참 잘못 이해했다. 선생님들의 조언이 그런 음흉함을 요구한 것이 아닌데, 속을 알 수 없는 한 길 사람 속 정도밖에 생각하지 못했으니 아직 큰 사람이 되려면 멀었다.
학원에서 항상 감정을 오버해서 표현하라는 피드백을 받아왔기 때문에 더 이해가 안 됐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연기와 전부 꺼내 보이지 않는 연기. 그냥 보면 상충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검에 대한 구절을 접하면서 깨달았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연기는 '자신을 늘 최고의 검으로 단련하고 벼려야 한다'는 말이고, 전부 꺼내 보이지 않는 연기는 '칼집 속에서 그 능력을 가늠할 수 없는 검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망생들은 스스로를 전설의 명검으로 단련하여 전쟁터에서 영웅의 손에 들려 세상을 구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녹슨 쇳덩이로 어느 무덤 속에서 썩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런 기회조차 없는 과도(果刀) 정도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검이 되든, 휘두를 기회가 있든 없든, 그럴 기회조차 있든 없든, 혼심의 힘을 다해 단련하고 벼려야 하는 것이 연기자와 지망생의 숙명이다.
전부를 꺼내 보이지 말라는 조언을 ‘이성을 잃은 연기, 더 이상 연기라고 할 수 없는 폭주를 주의해라’ 정도로 이해한 사람은 그래도 어느 정도 공부를 한 사람이다. 이것도 어느 정도는 일리 있는 말이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꺼내려다 한계에 봉착하게 되면 자신의 컨트롤 영역 밖으로 튕기기 쉽다. 사람은 컨트롤이 가능한 영역 안에서 세련될 수 있다. 영역 밖에서는 거칠고, 본능에 더 충실해진다. 그래서 한계까지 가지 않고 끝내는 요령이 필요하다. 그런데 더 나아가 연기자는 무한한 매력을 뽐낼 수 있어야 한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면, 비록 실체는 과도일지라도 전설의 검이 칼집 속에서 능력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보이는 것에서 끝나면 절대 안 된다. 이 조언의 실체는 능력의 90%만 꺼내도 다른 사람의 200% 능력 발휘와 진배없이 단련해야 함을 뜻한다.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의 프로페셔널 버전이다.
칼집에서 뽑힌 것이 과도일지라도, 일단 뽑히면 흉기일 뿐이다. 반대로 칼집 속에서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때는 전설의 무기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무기를 잘 갈고닦자. 그리고 뽑았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보여주자.